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고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을 띠거나 우울한 사람들의 특징이 최근 연구결과로 밝혀졌다고 한다. 그건 바로 '나는'이라고 시작하는 문장을 그 누구보다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매사에 '자기중심적'인 특징을 나타낸다고 한다. 자기 자신의 감정에 대해 지나치게 집중할수록 비참한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이 마침내 과학적 연구의 결과로 밝혀졌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너 자신에게 집중해, 너 스스로에게 행복한 일을 해, 라며 사회는 나 스스로에게 과도하게 몰입하기를 부추기는 듯한다. 그 어디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때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실제로 진정한 만족감과 안정감은 나에게 집중할 때가 아니라 타인에게 집중할 때에 생겨난다. 나 스스로에 대해 생각을 곱씹을수록 우울감은 더 깊어질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목표를 전환해서 세상과 타인에게 무언가 가치를 만들고 빛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 보면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깃들 것이다.
나 스스로도 놀라웠던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22살에 결혼을 했고, 22살에 연이어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나 스스로가 느끼는 나에 대한 감정은 내가 처한 객관적인 상황과 완전히 별개라는 것을 아이를 낳고 알게 되었다. 결혼 전에는 나는 나름 미래가 촉망받는 (?) 명문대생이었고, 좋은 학교의 좋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꿈도 포부도 컸다. 다만 그때는 나 외에 그 누구도 헤아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때 나의 온통 관심사는 '나'에게 있었다. 나가 학교를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떤 일을 구해야 하지, 어떤 남자를 만나야 행복할까, 어떻게 연애를 할까, 등등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마디로 모든 문장의 중심에는 '나'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스스로 느끼는 만족감과 행복감은 상당히 낮았다. 너무나 우울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지 몰랐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이 공부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지, 이 모든 것들이 불투명하다고 느꼈다. 오로지 '나'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가 되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나' 중심에서 '아기' 중심으로 서서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아기를 보며 좀 더 많이 웃었다. 아기를 보며 신기한 감정을 느꼈다. 아기가 전적으로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기가 다치면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다. 그 첫아기를 기점으로 나는 '나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서서히 벗어날 수 있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보다 아이를 기쁘게 하는 것들을 해나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이타적인 마음을 조금씩 배워나갈 수 있었다. 놀랍게도 나에게 과하게 집중했을 때보다 나 스스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은 좀 적어져도 타인에게 집중하기 시작하니까 마음은 훨씬 편안하고 심리적으로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나를 과하게 괴롭히던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한 번에 해소되었다. 정말 첫 아이를 난 이후로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외로운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누군가 늘 나와 함께 있는 것만 같은 든든한 감정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네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나는 자신할 수 있는 것이, 내가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더욱더 심각한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띤 나르시시스트가 되어있을 확률이 굉장히 크다는 것이다. 남을 위해 배려하고, 희생하고, 양보하고, 헌신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결코 몰랐을 것이다. 배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요즘 MZ 세대들을 일컫어 'ME GENERATION'이라고 한다고 한다. Me, Me, Me,,,! 오로지 나밖에 없는 세대, 모든 것이 나 중심으로 돌아가야 되는 그런 세대라는 것이다. 나도 그 세대의 일원이니 그런 개인주의적인 문화에서 자기 중심성이 발달된 사고방식을 더욱 고착시키지 않았을까?
한 사람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많이 성취했느냐'가 아닌 '얼마나 많이, 제대로 사랑했는가'가 기준이라면 그런 면에서 나의 20대는 그 자체로 성공의 길로 향하는 과정이었다고 평가된다. 사랑에 있어서 완벽해서가 아니다. 결코 완벽하지 않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예수가 아닌 이상 그 무결점의 100% 이타적인 사랑을 인간의 몸을 입고 실천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으로 끊임없이 삶의 방향키를 돌려나갈 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사회적으로 내가 큰 성공을 거두거나 괄목할만한 결과나 수치 따위를 내지 못했더라도 내 20대가 그 누구보다 성공적이었다고 자신 있게 평가할 수 있다. '사랑'을 배우는 가장 빠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조금은 더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 중심성으로 인한 우울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모든 목표를 '나에 관한' 목표에서 '상대방에 관한 목표'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작은 행위에서도 내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진정으로 확보하려면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궁극적으로 타인을 위한 선의의 행동이 되어야 한다.
조던 피터슨은 말했다. 만일 어떤 파티에 가서 나 목표가 '내가 편안해지는 것'이라면 나는 계속 내 스스로가 편안한지 안 편안한지 예민하게 신경 쓰느라고 절대 편안해지지 못하게 된다고 말이다. 반면 나의 목표가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나는 끊임없이 그들을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과정가운데 자연스럽게 나 스스로에 대해서는 편안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선택은 '미래의 나'를 섬길 것인가, 지금 존재하는 '나'만을 섬길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고집스럽게 이기적으로 굴어 지금 당장 나에게 좋은 것만 한다 해도 그 뒤에는 내일의 '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내일모레의 '나', 그다음 날의 나.. 10년 뒤의 나, 늙어 있는 나,, 이렇게 무수한 '나'는 시간으로 연이어져 궁극에는 하나의 '커뮤니티'가 된다. 나를 제대로 섬기는 것과 가족을 제대로 섬기는 것, 그리고 커뮤니티를 제대로 섬기는 것에는 조금의 차이도 없다. 완전히 섞여서 하나의 존재가 된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이기적인 선택이란 본질적으로 나라는 전체 커뮤니티를 파괴하는 파괴적인 선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빛을 가지고 있다. 그 빛은 나만이 세상에 발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 빛을 발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더 어두운 곳이 될 것이다. 기억하자, 나 스스로에 대한 과도한 집중은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비참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말이다. 주위로 눈을 보려 도움이 필요한 사람, 내가 무엇인가 베풀 수 있는 사람을 보고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하자. 그들에게 잘하는 것은 곧 나에게 잘하는 것과 같다. 나를 막 대하는 것은 곧 타인을 막 대하는 것과 같다.
만일 내 글쓰기의 목표가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이라면 나는 결코 이 글쓰기를 유지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분이라도 내 글을 기다리고 있을 분들, 내가 가진 능력을 전환시켜서 단 한 사람에게라도 내게 얻어진 깨닫음을 나누어 줄 수 있다면, 그래서 그들의 사고방식이 개선되고, 변화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나와 당장의 물질적 이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궁극의 선으로 이어질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칼 융과 니체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Everyone is really responsible to all men for all men and for everything."
즉,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구원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가장 신실한 진심을 다하여 모든 일과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지는 마음을 갖는 순간, 당신은 이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또한 실제로 당신이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 “There is only one way to salvation, and that is to make yourself responsible for all men's sins. As soon as you make yourself responsible in all sincerity for everything and for everyone, you will see at once that this is really so, and that you are in fact to blame for everyone and for all things.” )
내 마음가짐과 목표가 '모든 사람과 모든 일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가 된다면 내 작은 행위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행위가 무엇이 되었든 말이다. 그것은 곧 세상의 무수한 죄에 대한 속죄의 행위가 된다. 단 한 사람도 비판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게 된다. 만일 누군가가 다른 어떤 일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는 어투의 말을 한다면 나는 속으로 조용히 생각할 것이다. "너는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고치기 위해 무엇을 했니?" 사람들은 다른 이의 그릇된 행동에 본인의 책임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애초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갖는 존재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 따르면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중심성이라는 죄로 물든 이 땅에서 속죄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세상의 많은 것들은 수치고 결코 환산될 수 없는 것들이 여전히 정말 많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수치로 환원 가능한 모든 것들은 인간세상에서 통용되기 위한 인간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하고, 그 외의 수치로 환원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자연과 신이 인간에게 선물로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에 맞게 옷을 바꾸어 입는 나무들, 울창한 숲이 내뿜는 맑은 공기, 그 어떤 인공파도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거친 파도, 생명의 신비로 창조된 갓난아기, 아이가 나에게 보내는 함박웃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어떤 수치로 환산되기 힘들 것이다. 그런 것들은 자연의 예술품이며 신의 창조물 그 자체이다. 우리끼리 서로 편리하고자 이 땅의 많은 것들에 가격표를 붙이고 숫자로 그 가치를 통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우리 스스로가 만든 시스템이라는 감옥 안에 갇혀 살게 되었지만, 여전히 진짜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것, 인간다움을 꺼내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들뿐이다. 그중에 하나도 '남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마음'일 것이다.
아무리 내가 불행하고, 우울하고, 못나고, 비교되고, 억울하고, 답답하다 한들 그것은 내 마음의 시선을 오롯이 나에게 고정시켰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나에게서 시선을 떼어 다른 사람을 바라보자. 그들에게 내가 줄 수 있고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울감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나를 위해서 쓰지 않고 나의 작은 이야기가 그 누군가에게 가닿아 용기가 되고, 영감이 되고, 지식이 되고, 충만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이것 또한 내가 '사랑'이라는 것을 더 깊이 배워가고 '이기적인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는 효과적인 지름길이 되기를 바라며 - 모든 사람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바로 그 마음으로 말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매일을 살아간다면 어쩌면 우리가 꿈꾸는 천국은 죽어야만 갈 수 있는 저승의 도착지가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 이 땅에서 우리가 함께 구현해 나가는 삶의 모습이 될 것이다.
“Humility is not thinking less of yourself, but thinking of yourself less ” - C.S. Lewis
"겸손은 나 스스로를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생각을 낮게 (덜)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