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감상법 - '아이나'를 '릴리'로 받아들이기까지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세 명이다.
게르다 베게너, 아이나 베게너, 그리고, 릴리 엘베.
남성의 육체에 깃든 여성의 자아. 젠더와 젠더가 부딪히는 과정. 그 안에서 고뇌하고 희생하는 자신과 타인.
그저 '트랜스젠더'라는 말보다, 자신의 운명을 바꾼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더 잘 어울리는,
멋진 사람과 그 동반자의 이야기.
왜 'The Danish Girl' 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릴리는 독일에서 성전환수술을 받으며 비로소 자신이 '진짜' 여자가 되었다고 표현했다. 자신의 말대로 아이나와 릴리는 다른 인격체고, 다른 인생을 사는 별개의 인물이다. 내면에 있던 릴리가 비로소 현실이 되면서 아이나는 죽었다. 그렇다면 독일에서, 독일인 의사에 의해 새 삶을 얻게 된 릴리 엘베는 The Danish Girl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하기에 거리낌이 없는 인물인가?
여기서 속인주의니 속지주의니 따질 생각은 아니다. 다만, 나에게 The Danish, The Korean, The American과 같은 표현은 그저 그 사람의 국적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흑인을 'African American'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한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한국인 다 됐네~'라는 말을 칭찬 삼아 건넨다. 그 사람의 origin, 즉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상상하게끔 만드는 단어인 것이다. 이 영화에 The Danish Girl이라는 제목을 붙인 감독의 의도는 바로 아이나의 어린 시절에 있다.
아이나는 고향 바일레에서의 기억을 줄곧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릴리의 역사는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 한스가 자신에게 키스를 한 순간, 그 찰나가 아이나가 처음으로 자신이 여자임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릴리는 그 순간 잉태되었고, 어쩌면 아이나는 그때부터 릴리로서의 삶을 준비했을지도 모른다.
지난밤에 정말 아름다운 꿈을 꿨어.
내가 아기였을 때, 엄마 품에 있는 꿈이었지.
엄마가 날 내려다보며
나에게 릴리라고 불렀어.
"릴리."
두 번째 수술을 겪은 뒤 이 말을 마지막으로 릴리는 숨을 거둔다. 아주, 아주 작은 아이였을 때부터 릴리는 아이나의 꿈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자신이 릴리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아이로 다시 태어나는 꿈. 원래 그랬던 것처럼, 여자아이들 무리에서 뛰어놀고 또래 남자아이를 남몰래 좋아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는 꿈. 덴마크 바일레에서 나고 자라, 현재는 코펜하겐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여자 '릴리 엘베'가 되는 꿈. "The Danish Girl"은 다름 아닌 아이나 베게너가 평생토록 간직해왔던 꿈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 영화에 나오는 또 한 명의 Danish Girl.
바로 게르다 베게너. 이는 '대니쉬 걸'이라는 제목의 이 영화가 동시에 게르다의 이야기임을 암시한다.
성 정체성으로 방황하는 남편, 그 고통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라봐야만 하는 자신. 평화로웠던 두 사람의 관계는 '릴리'가 나타남으로써 흔들리고 균열이 일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릴리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라기 보다, '아이나'를 '릴리'로 받아들이는 게르다라는 한 사람의 일대기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사람들은 언제나 마지막만을 기억하기 때문에 게르다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입장이라 생각하기 쉽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이 아이나의 전부일 거라 생각했던 게르다. 그러나, 게르다조차 남편의 깊은 내면을 이해하는 데는 소홀했던, 오만한 타인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알아가고, 마침내 '릴리'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게르다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바일레의 늪. 그 늪을 들여다보기까지
이 영화는 처음과 끝을 모두 바일레의 풍경으로 장식했다. 뭐 고리타분하게 말하면 수미상관식 구조다. 빛 한 점 없는 구름 낀 흐린 하늘, 앙상한 나뭇가지, 사람의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허허벌판. 외롭다 못해 음침하게까지 느껴지는 바일레의 겨울 풍경은 아이나의 마음속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하다.
그런 바일레의 풍경이 한 차례 지나간 뒤, 그것을 그린 아이너의 그림이 나타난다. 액자 속에 갇힌 듯한 바이너의 풍경을 응시하는 게르다. 그러나 이내 다른 사람이 거는 말소리에 주위를 빼앗기고 만다. 아이너는 그림은 온통 바일레의 고향으로 채워져 있었다. 고향에서의 풍경, 그리고 친구 한스와의 추억을 계속 되뇌며 그리고 또 그렸다. 아이나가 줄곧 그렸던 고향의 그림들은 그때의 자신, '릴리'를 그리워하는 내면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그런 아이나의 내면이 담긴 그림을 많은 사람이 모인 전시회에서, 액자에 예쁘게 모셔진 형태로 게르다는 바라보고 있다. 자신의 남편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던 그였지만 정작 아이나의 깊은 곳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다를 게 없었다.
극 중 초반, 아이나에 대한 게르다의 무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이다. 자신의 그림을 또 퇴짜 맞고 집으로 돌아온 뒤 애꿎은 아이나에게 심술을 부리는 게르다. 어쩌면 게르다는 직업적으로 남편을 질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가까울수록 등잔 밑이 어둡고, 가까울수록 자신의 이기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쉽다. 그러나 흥미로운 사실은 게르다 자신도 후에 '릴리'의 그림만을 계속해서 그린다는 것이다. 같은 그림만 그리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게르다는 릴리의 사후에도, 계속 계속 릴리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영화는 이런 방법으로 게르다가 아이너를, 릴리를 이해하는 과정을 풀어냈다. 자신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면서.
왼쪽 장면은 아이나가 전시회 관장에게 게르다의 그림을 봐달라고 했으나 결국 그림을 거절당한 뒤 아이나에게 하는 말이다.
오른쪽 장면은 첫 번째 수술을 끝마친 뒤, 그림을 그려보라는 게르다의 말에 대한 아이나의 대답이다. 극중 초반과 후반. 두 사람의 입장은 이렇게나 바뀌게 된다. 아이나의 저 말을 들은 게르다는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마지막 장면. 역시 영화의 가장 처음과 같이 바일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 장면과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아이나가 그린 액자 속 그림으로 바일레를 접했던 게르다가 이번엔 직접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아이나의 그림 속 풍경들을 실제로, 자신의 눈에 하나 하나씩 담아본다. 바일레의 바람을 느껴본다. 게르다는 릴리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릴리가 보았던 나무와 들판, 여전히 흐린 하늘과 그 사이로 비치는 빛줄기를 보며 아이나의 깊은 곳에 있던 릴리의 존재를 진정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는 스스로를 죽이고, 또 누군가는 사랑하는 남편을 떠나보내야만 했다. 바일레의 늪, 그 속을 직접 들여다보기까지. '아이나'가 '릴리'가 되기까지. 릴리가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가끔 당신은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사라질 것 같아.
당신의 어렸을 적 친구의 연처럼.
-한스.
맞아, 한스.
방해하려던 건 아니야.
-괜찮아, 다 했어.
그리고 걱정 마. 늪으로 사라지지 않을테니.
늪은 내 안에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