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 풋내기의 '현지인 팬티' 장착기
작년 9월, 아이가 처음 괌 학교에 입학했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몰라서 울고 웃었던 몇 가지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데, 그래도 괌에 산 지 1년이 넘었다고 그런 기억들이 이젠 추억이 되었다.
그 추억 중 한 가지.
킨더 때 아이의 학급에선 매일 7가지 색깔로 아이의 학교생활을 평가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제도는 아니었다.)
Pink
Purple
Blue
Green(0점)
Yellow
Orange
Red
색깔 따위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교실에서 나올 때 그들의 표정을 보면 이미 누가 Pink인지, 누가 Yellow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Pink를 받은 아이는 기세 등등하게 "Pink!!!!!!"를 외치며 엄마에게 달려오고, 좋지 않은 색깔을 받은 아이는 어깨가 축 처져 나왔다. 뿐만 아니라 Pink를 한 주 동안 3번 이상 받은 아이는 "Treasure box"라고 불리는 선물 상자에서 선물을 하나씩 가져갈 수 있으니 어찌 아이들에게 (그리고 부모에게) 이 색깔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우리 아이는 영어를 전혀 못했으니, 나는 점점 '바른'(이라 쓰고 '얌전한'이라고 읽습니다. 흑흑)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했다. 언어적 소통이 안되니(자기 스스로를 변명하거나 변호할 수 없으니) 아이가 최대한 지적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학교생활 극초반기에는 항상 Pink를 받았다. (그냥 앉아만 있다가 와서...)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아이의 평가표에 점점 Pink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Yellow를 받은 날,
아이를 데리러 간 나를 선생님께서 불러 세웠다.
"오늘 너희 아이가 yellow를 받았어. 왜냐하면 나를 미쎄쓰땡땡이라 부르지 않고 teacher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야. 호칭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쳐주었지만 그 뒤로도 계속 호칭을 잘못 썼어. 집에서 나를 어떻게 호칭해야 하는지 제대로 가르쳐주길 바라."
'뭐야, 고작 그걸로 아이를 yellow boy로 만든 거예요? 한국에선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냥 선생님이라 부른다고요!'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내 입에선 "I'm sorry."라는 말만 되풀이되었다.
(따지고 싶었던 마음은 '호칭'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문화에 무지했던 나의 모자란 마음이었던 것, 선생님께서 내 아이에 대해 무언가를 지적할 땐 '미안해'라는 사과 대신에 'Thank you for letting me know.'정도의 인사면 된다는 것을 이곳에 점점 적응하며 알게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Red를 받은 날,
선생님은 또 나를 불러 세웠다.
우리 아이가 다른 친구와 함께 총놀이를 했단다. (오 주여!) 학교 내에선 'gun'이라는 단어도, '두두두두'하는 효과음도, 총을 연상시키는 어떤 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또 "I'm so sorry."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친구가 다가와 먼저 두두두 해서 자기도 두두두 했다고. 그런데 왜 오늘 red를 받은 건지 모르겠다고 울먹이는 아이를 호되게 나무랐다. 선명한 red color가 그땐 왜 그렇게 위협적이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왜 안되는지 아이가 '아하!' 할만하게 명쾌하게 설명해주지 못했다. 뜨거운 여름이면 한국에서 다니던 유치원 마당에서 친구들과 신명 나게 물총놀이를 해댔던 기억이 아이의 머릿속엔 여전히 강렬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성적표가 내 성적표 같았다. 아이가 매일매일 받아오던 그 색깔들이 내 이마에 도장처럼 찍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가 처음 yellow를 받던 날, 속상해서 친정엄마와 통화를 하는데, 옆에서 그 이야기를 듣던 친정아빠가 껄껄 웃으며 좋아하셨다.
"드디어 우리 우진이가 적응하고 있나 보다. 짜식!"
5살(괌 나이) K5 유치원생 남자아이가 맨날 pink만 받으면 그게 좋은 거냐고, 좀 알록달록해야 예쁘지.
아빠의 혼잣말에 마음이 녹는다.
예쁜 무지개 색깔로 아이를 매일매일 평가했던 괌 학교의 평가 방법도 그것을 "그냥 색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엄마들이 있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비장하지 말자. 여기는 모든 것이 여유로운 남국의 섬, 괌이니까!
킨더를 졸업할 무렵 텍사스 출신의 어떤 학부모는 미쎄쓰땡땡을 이렇게 평가했다.
"미세스땡땡은 정말이지 딱딱해, 누가 보스턴 출신 아니랄까 봐! 그렇지 않아?" (자체 순화 필터를 거쳤습니다.)
아, 웃지 않으려고 했는데 웃음이 나왔다!
남부 출신 여자가 동부 출신의 여자 뒷담화를 한국 출신 나에게 하다니! 이제 나도 '현지인이라는 옷' 중에 팬티 정도는 입은 건가? 싶은 안도의 마음이 담긴 웃음이었다.
1년 동안 발가벗은 느낌이었다. 아무리 이 땅을 스쳐가는 나그네처럼 살고 싶은 '나'이지만 몇 가지 아이템을 장착하는 건 그 삶을 좀 더 재미있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현지인 팬티 아이템이 +1 추가되었습니다."
추신) 저는 텍사스에 가본 적도 없고, 보스턴에 가본 적은 있지만 보스턴 출신 친구는 없습니다. 특정 지역 사람들의
특성은 잘 알지 못하는 서울 출신 여자입니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