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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Feb 14. 2023

이야기꾼 아이와 발표 불안인

 프롤로그: 결국 탈출의 길을 찾았다

어렸을 때 나는 동네에서 소문난 이야기꾼이었다. 한껏 뛰어놀다가 지칠 무렵, 동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내게 이야기를 주문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신나서 앞뒤 맞지도 않는 이야기를 술술 지어내며 또래 아이들을 홀렸다. 주가가 한창 높을 때는 옆동네로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출처: shutterstock)


중고등학교 시절, 수업 중 시간이 어중간하게 남을 때면 반 친구들은 선생님께 정화 이야기 타임을 갖자며 조르기도 했다. 그럼 나는 또 얼른 교단 앞으로 나가서 만담꾼이 되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풀어대곤 했다. 이랬던 아이가 자라서 발표 불안인이 되었다.      


(출처: shutterstock)


나는 태생적으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즐기며 호기심 많고 에너지가 넘치는 편이었다. 그런데 20대 초반에 생긴 발표 울렁증으로 불안의 세계에 입문을 했고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잊기도 하고 헷갈리기도 하면서 10년 이상을 살았다. 뇌세포를 분자 단위로 잘게 쪼개 보면 호기심이라는 글자가 여기저기 새겨져 있을 듯한 나는, 세상 모든 것에 대해 늘 궁금한 게 많았다. 


(출처: shutterstock)


그런데 발표에 대한 공포 때문에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주저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며 멈추어 서곤 했다. 십수 년을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불안을 끌어안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단단히 마음먹고 스피치 학원을 다녀보고 특강도 다니고 각종 동영상과 논문, 책을 파며 답을 찾아 헤맸다. 결국, 탈출의 길을 찾았다. 많은 비용과 시간, 노력이 들긴 했지만 발표 불안을 확실히 떨쳐낼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출처: shutterstock)


이제야 비로소 마음 편히 행복해졌다. 업무 보고나 세미나 발표 같은 일정이 잡히면 며칠 전부터 뭉게뭉게 불어나는 부담감으로 안절부절못했던 예전과는 달리 발표 전날에도 덤덤하게 두 다리 쭉 뻗고 잘 잔다. 길고 길었던 발표 불안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원래의 이야기꾼으로 돌아왔다. 돌아오고 보니 ‘편안한 마음’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불안하고 상처받은 마음이 삶의 질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에 대해 온몸으로 깨달았다.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쏟은 후 만난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고 효과가 너무 좋았다. 혼자만 알고 있기가 아까웠다. 내 발표 불안의 여정과 해소 방법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출처: shutterstock)


열흘 동안, 태어나서 글을 그렇게 열심히 써본 건 처음이었다. 10월 중순쯤이었나. 프로젝트 하나가 끝나서 일주일 조금 넘게 일정이 여유로웠다. 지금 아니면 마음 놓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한동안 없을 듯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글을 썼다.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기 전에 쓰고 일하는 틈틈 글을 쓰고 점심을 얼른 먹고 들어와서 쓰고 퇴근 후 글을 썼다. 그랬더니 열흘 동안 50페이지가량 되는, 10편의 글을 썼다. 내가 글을 그토록 빨리 쓸 수 있는 속작인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내 나름의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라 여겼던 '브런치에서 공개적인 글쓰기'가 동기 부여가 되었던 걸까. 차근차근 제대로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출처: shutterstock)


발표 불안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어떤 글도 강연도 말도 나를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심리학 박사, 정신과 전문의가 쓴 글을 환자도 아닌 내가 왜 읽어야 하는지, 심적 거부감이 있었다. 발표 불안을 전문적으로 다룬 글에 손을 대기가 쉽지 않았다. 편하게, 쉽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발표 불안에 대한 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발표 불안을 다룬 내용 사이사이에 여러 나라, 다양한 분야에서 겪은 내 이야기를 함께 엮은 책을 써 봐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나는 캐나다, 미국, 멕시코, 스페인에서 공부를 했고 인도, 온두라스, 멕시코, 콜롬비아, 한국에서 일을 했다. 광고 회사, 국회, 방송국, 전자 회사, 자산운용사, 섬유 회사, 지문/얼굴 인식 기술 IT 회사, 참치 캔 뚜껑 만드는 회사, 전력 관리 칩 개발 회사를 다녔다. 도합 20년 정도 일을 했고 그중 8년은 회사를 운영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일을 하면서 겪은 황당하고 재미나고 신나고 슬프고 감동적이었던 일들에 호기심 넘치는 프로 이직러가로 사업을 시작하면서 맞닥뜨린 온갖 사건 사고들. 이야기 소재가 제법 많긴 했다. 


호기심 넘치는 전직 이야기꾼이 발표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그 와중에 불안에 빠진 스스로와 밀고 당기는 힘 겨루기를 하며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인생의 길을 찾아가는 서사를 담은 책,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 2년 간 공을 들여 글을 썼고 운 좋게도 멋진 출판사와 연이 닿아 계약을 맺었다. 그러곤 얼마 전에 퇴고 작업을 마쳤다. 


(출처: shutterstock)


홀가분한 마음으로 브런치를 2년 만에 다시 찾았다. 브런치에 들어와서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고 있으면 이상하게 새로운 주제에 대한 글이 쓰고 싶은 욕구가 마구 치고 올라와서 책을 쓰는 동안, 브런치를 강제로 끊어야 했다. 드디어 마음 편하게 브런치 글을 읽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브런치 글들은 또 내게 '새로운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 싶은 동기 부여를 쏟아붓는다. 


불안에 대해서 제대로 파는 글을 써 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는데, 새로운 글을 브런치에 한 편 올린 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새 글 링크를 출판사 편집부와 공유를 했었는데 편집부에서 출간 예정인 책의 내용 일부를 브런치에 공유해도 좋다고 했다. 그래서 불안에 대해 본격적으로, 집중적으로 파고 싶었던 마음을 조금 뒤로 하고 출간 전, 2년 동안 썼던 원고의 일부를 브런치에 올리려고 한다. 


발표에 대한 부담감으로 홀로 속앓이를 하고 있을 직장인, 발표 스트레스로 직장을 그만 둘 생각을 해본 적 있는 이,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발표만 하게 되면 모자란 사람으로 변하는 누군가, 일 욕심 많아서 돌격 앞으로를 신나게 하고 싶은데 발표 불안에 발목 잡혀 있는 사람에게 브런치에 올리는 이 글이 닿기를 바란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 고민 중인 이도 환영이다. 스스로와 조금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 발표 아닌 다른 원인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이에게도 내 글이 다다르면 좋겠다.      


부족하고 어설프지만 진심을 담은 내 이야기가, 어렸을 때 한껏 뛰어놀다 지친 동네 아이들에게 그랬든, 누군가를 편안하게 홀리길 바란다.


한 주에 두 편씩, 연재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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