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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Feb 16. 2023

나를 거부하는 나

#1: 긴장하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

불안은 잠재적인 위험에 반응하는 기관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으로, 일종의 생존 본능이어서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불안증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없었던 게 갑자기 생겨서 도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만 있는 거라서 ‘나는 문제가 있구나’하고 인지가 쉽게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출처: shutterstock)


불안증은 원인도 증상도 다양하다. 나의 경우는 발표가 불안증의 원인이었다. 발표 전 긴장 상태가 선을 넘으면서 강도가 제법 높은 불안증에 시달렸다.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할 때 떨리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누구나 긴장을 한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괜찮고 어떤 사람은 힘든 걸까? 보통은 발표 전에 긴장되더라도 이내 추스르고 할 말에 집중하고 불안을 적당히 흘려보낸다. 그런데 우리 발표 불안인은 불안에 붙들린다. 불안에 사로잡히고 만다. 이유는 바로 ‘긴장하는 자신을 거부하는 마음’ 때문이다.      


나는 발표하기 전에 긴장되면 얼굴에 열감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불안증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이걸 극도로 싫어했다. 얼굴이 빨개지면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이 훅훅 치고 올라왔다. 싸움에서 지는 듯한 느낌? 기 싸움에서 밀린 기분? 약한 내 내면이 노출되는 마음? 이런 감정이 이리저리 섞여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얼굴이 붉어지기라도 할까봐 온 신경이 집중되어서는 열이 오르는 걸 어떻게든 가라앉혀 보려고 안간힘을 쓰곤 했다.


(출처: shutterstock)


슬프게도, 긴장했을 때 얼굴이 붉어지는 건 아주 당연한 신체 반응이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표를 잘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면 뇌에서 각종 각성 호르몬을 분비해 교감 신경을 자극한다. 그러면 이 교감 신경이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고 이로 인해 심장 박동이 증가하면서 혈류량이 늘어난다. 결과적으로 행동이 빨라지고 정신이 또렷해지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수행 능력이 높아지는 것이다.


나는 혈류량이 증가할 때 그 피가 얼굴 쪽으로 몰리면서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긴장하면 얼굴이 빨개지는 건 우리 모두 아는 증상이고 이 증상이 있는 사람은 아마 지구상에 몇억 명은 되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이 증상이 생기는 나를 거부했다.


얼굴이 붉어지는 나를 거부하고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혀 보려고 용을 썼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 행동은 ‘땀아 나지 마라, 심장아 멈춰라’ 같은 맥락이지만 예전에는 몰랐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헤아려 보는 것에 참 인색하다. 부정적인 감정을 인정하고 살펴보는 데에도 무척 박하다. 나는 십수 년을 발표 전 안절부절못하는 마음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했음에도 한 번도, 정말이지 단 한 번도 그 감정의 실체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냥 단순히 성격 탓을 하고 낯가림이 있겠거니 여겼다.


(출처: shutterstock)


그러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비로소 내 감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는 걸 싫어한 게 아니라 그걸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걸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숨기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감정에 '왜'라고 붙여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왜 싫었을까?    

 

업무 보고를 하는데 부장님 얼굴이 잠시 붉어졌다? 어쩌라고. 직장에서의 일상적인 업무 보고 자리에서 어느 누구도 발표자의 표정을 면밀히 살피지 않는다. 신사업 프로젝트 세미나 시간에 어떤 사람도 발표자가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고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는 연구도 있다. 즉, 얼굴에 홍조를 띄는 건 '들키거나' '숨기거나'하는 류의 표현과 어울리지 않는다. 누군가는 얼굴이 잘 빨개지고 어떤 사람은 잘 안 빨개지고.


그런데 불안의 감정이 여기에 끼어들면 '나는 절대 얼굴이 붉어지면 안 돼. 들키면 안 돼. 숨겨야 해. 아무도 몰라야 해'의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이상한 생각은 불필요한 수치심으로 이어진다. 교감 신경은 마음을 쓸수록 의지가 더 생겨 더 자극을 받기 때문에 달아오르는 얼굴을 가라앉히려고 신경을 쓰면 되레 더 붉어진다. 그래서 ‘얼굴이 붉어지면 안 돼’라는 이상한 생각은 결국 ‘오늘도 결국 얼굴이 달아오르는구나’가 되면서 ‘오늘도 망쳤다’는 부정적인 결과가 더해지면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생긴다.


(출처: shutterstock)


문제는 이 수치심이다. 수치심은 내 안에 나답지 않은 내 목소리 하나를 더 키운다. 타고난 내 기질과 성향과는 전혀 다른, 평소의 나 같으면 근처에 서성거리지도 않을 듯한 레벨의 비관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생각이나 감정이 뜻하지 않은 타이밍에 쑥쑥 걷잡을 수 없이 올라온다. 나와 하루 종일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내’가 틈만 나면 온갖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내는데, 멀쩡할 수 있을까? 나를 보는 내 눈이 수치심 안에 갇히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별의별 부정적인 생각, 우울한 생각, 지저분한 생각으로 마음이 꽉 차게 된다.


이런 컴컴한 생각은 일상을 무너뜨릴 정도의 무기력을 만들고 잘해보고자 하는 의지를 꺾는다. 게다가 나를 갉아먹는 이 삐뚤어진 감정은 나에게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에 대한 지나친 경멸, 도를 넘는 친절이나 병적 자기 과시 등이 수치심을 감추려는 방어 기제로 발현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발표를 한 번도 망쳐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거다. ‘망쳤다’라는 게 어차피 스스로의 주관적인 판단이고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개인마다 다르다 보니 누군가의 기준에는 더없이 완벽해 보이는 발표라 할지라도 정작 본인은 망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니 스스로의 기준에 ‘망했다’라는 경험, 한 번도 없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그런데 발표를 망쳤다고 모두가 불안증을 갖게 되는 건 아니다.

  

(출처: shutterstock)

   

우리 발표 불안인의 가장 큰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긴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거부하고 싫어한다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목소리, 시선 처리, 손동작, 자세, 기승전결 흐름의 짜임새, 발표 자료 준비 등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더욱이 긴장 속 발표 경험이 아직 많지 않은 상태이거나 청자가 어려운 사람들일 경우 혹은 그날 심적 물리적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상황일 경우 긴장은 배가 된다. 그런데 발표 불안인들은 스스로에 거는 기대가 너무 커서인지 아니면 잘했다고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높아서인지 남들 눈에 멀쩡해 보이는 발표도,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오늘도 떨었다.’ ‘역시나 망쳤다’로 혼자 결론을 내리고 자책하기 시작한다. 이게 말썽이다.    

 

떨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내려놓아야 한다. 발표 불안으로부터의 탈출은 아주 간단한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긴장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다. 당연한 신체 반응이다. 내가 괴로운 이유는 긴장하는 걸 거부하는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긴장을 거부하는 마음. 떨고 있는 자신이 용납되지 않는 마음. 초조하고 애가 타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건 실은 긴장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신체 반응을 거부하고 있는 내 마음 때문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나는 실은 얼굴이 붉어지는 게 싫었던 게 아니라 별거 아닌 발표 하나에 긴장한 티를 내는 내 모습이 싫었던 거다. 


(출처: shutterstock)


나는 요즘 긴장해서 얼굴이 달아오른다 싶으면 ‘얼굴 좀 빨개지면 어때?’, ‘얼굴 홍조가 뭐 대수라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긴장감을 흘려보낸다.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한순간에 바로 불안감을 내던지듯 떨쳐낼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꾸준히 반복적으로 연습을 하긴 했다. 중요한 건 인식이다. ‘자연스러운 신체 반응을 용납 못 했던 내 마음이 문제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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