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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Feb 20. 2023

손톱 밑 가시는 참 아프다

#2: 발표 전 불안 증후군

"발표 전에 긴장 좀 하는 게 뭐 대수라고."


그럴 수 있다. 생사를 오가는 일은 아니지. 


"발표 좀 망쳤다고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냐? 월급이 깎이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생계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지. 


"목소리 좀 떨렸다고 그게 그리 너를 책망할 일이냐?"


맞다. 하루 이틀 지나면 다들 기억도 못하겠지. 


(출처: shutterstock)


발표를 앞두고 긴장을 하는 게, 발표를 망쳤다는 것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사람들 앞에서 말하다가 실수 좀 한 거’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기도 한다. 어떤 이에게는 단순히 '발표 날이 잡히고 나서 조금 초조한 정도'일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입맛이 없어지고 식욕이 뚝 떨어지고 심지어 밤에 자다가 답답한 마음에 깨기도 하는 일'일 수도 있다. 


누구나 내 손톱 밑 가시가 가장 아픈 법이다.


내가 발표 불안증이 있었다고 하면 주위 사람들은 픽 웃는다. 내가 스피치에 대한 두려움으로 15년 이상 힘들었다고 하면 믿어줄 사람이 별로 없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긴장할 만한 일이지만 내 발표 전 초조함은 일정 선을 넘어 ‘불안증’의 범주에 속할 정도로 몹시 심한 편이었다. 그럼에도 내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내 증상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발표를 하기 전 온갖 불안 증세에 시달리다가 막상 발표가 시작되면 상태가 멀쩡해지는 자칭 ‘발표 전 불안 증후군’을 앓았다. 이 증상은 삶을 외롭게 만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증상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도 어렵다. 딱히 힘들어 보이지 않는데 뭐가 문제냐며 소소한 호들갑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발표 자리를 피하고 싶은 내 속마음과 달리 단순히 하기 싫어서 피하는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출처: shutterstock)


발표 자리가 있기 며칠 전부터 밤잠을 설치고 입맛이 없어졌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을 중얼거리다가 잠들기도 했다. 발표 당일이 되면 아침부터 가슴이 너무 뛰어서 가슴팍에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발표를 시작하기 일보 직전은 참 고통스러웠다. 머리가 멍해지고 입안이 바짝 마르면서 극도의 긴장 상태를 겪었다. 그런데 막상 말을 하기 시작하면 긴장이 어느 정도는 가라앉는다. 아주 가끔 긴장 상태가 계속 유지될 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발표를 시작하면 말하는 내용에 집중하면서 긴장 상태가 비교적 진정이 되긴 한다. 그래서 더 괴롭다. 


멀쩡해 보이는데 뭐가 문제일까? 문제다. 실은, 더 문제다. 막상 시작하면 아무렇지 않은데 발표 시간 전까지 아주 힘든 시간을 보내고 발표가 끝난 다음 밀려오는 허탈감은 무어라 설명하기도 어렵다. ‘시작만 하면 큰 증상도 문제도 없는데 도대체 이게 뭐라고 며칠 내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사막처럼 황폐해지곤 했다.


(출처: shutterstock)


“사람들 앞에서 얘기할 때 혹시 긴장하세요?” 내 눈에 아주 외향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 물어본다. ‘그런 거 긴장을 왜 해요’를 이마에 붙이고 있을 것 같은 사람도 대부분 “그럼요, 떨리죠”라고 답한다. 문제는 이다음이다. “그런데 긴장은 누구나 다 하잖아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할 말에 집중하다 보면 긴장감 같은 건 원래 사라지게 돼 있어요.”


그렇지 않다. 이게 ‘그냥 그런가 보다’라고 할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는 고작 발표 전 느끼는 긴장감 정도일 수 있지만 내가 느꼈던 불안감은 지독한 고통이었다. 


발표 불안 증상은 대게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거나 엄청나게 떨리거나 혹은 염소 목소리가 나기도 하고 무릎이 부들부들 흔들리고 식은땀이 나기도 한다. 또는 머리가 멍해져서 할 말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기도 한다. 이 증상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힘들다. 


그런데 한 단계가 더 있다. 사람들 앞에 서서 그냥 말만 하면 되는, 그 쉬운, 그 별거 아닌 일에 가슴이 답답하고, 긴장되어 잠을 못 자는 내 모습이 ‘너무 우습고 한심해 보이는’ 그 자괴감으로 한 번 더 괴롭다. 발표 순서, 발표 자리만 지나가고 나면 전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쩡해지고 그 시간이 다시 오면 불안 증상이 반복되고 그 증상이 가라앉으면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런 감정들이 쌓이면서 불안 증상이 더 심해졌다. 발표 불안 증상이 지속되고 반복되니 자존감이 녹아내리더라. 


(출처: shutterstock)


나는 외관상 긴장한 티가 많이 나지 않음에도 발표 자리 그 자체가 너무 무겁고 불편해서 20대, 30대 중요한 시기에 좋은 기회를 많이 놓쳤다. 날 선 자존심 덕분에 학교 동기나 직장 상사, 동료들에게 제대로 말 한 번 못 꺼내고 혼자 끙끙대며 십 년을 넘게 고생했다. 커리어에 아주 도움이 될, 업무적으로 날개 달고 공중 부양할 수 있는 큰 기회를 발표 자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절하거나 피하기도 했다. 


발표 불안에서 조금 더 일찍 벗어날 수 있었다면 조금 다른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유학을 가는 대신 직장 생활을 조금 더 오래 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퇴사하긴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핑계인 경우가 많았다. 발표 자리를 겁내지 않았더라면, 나서야 하는 업무가 많았던 팀장 자리를 굳이 관심 없는 척 연기를 하지 않았을 듯하다. 또는, 이야기꾼의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넘치는 호기심으로 숱한 사고를 친 후 그 뒷감당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화를 이야기로 만들어 여기저기 다니며 강연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출처: shutterstock)


"왜, 도대체, 굳이 발표 불안에 대해서 책까지 내고 싶은 거야?"


참 많이도 받았던, 받고 있는 질문이다. 


발표 불안, 그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게 실은 생각보다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리고 때로는 인생의 방향 자체를 바꿔놓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증상을, 방법만 제대로 알면 온전히 극복 가능하다는 걸 나누고 싶었다.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둔 극복 방법이 분명히 존재하며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과 '함께' 생각을 바꾸고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서로 칭찬해주며 꾸준히 관리하면 놀라울 정도로 좋아진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발표 불안 증상에 손가락 하나라도 담그고 있으신 분들, 어서 이리로 오시라. 내게로 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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