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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화 Feb 23. 2023

스페인에서의 내 대학원 시절은 원고 쓰다 다 갔다

#3: 수치심이 만든 완벽주의 

나는 발표 원고에 상당히 집착했다. 조금 중요하다 싶은 발표가 있을 때면 원고를 꼼꼼하게 쓴 다음, 잠을 줄여가며 단어 하나하나까지 모두 외웠다. 이게 실제로 긴장감을 줄여주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대본을 준비하지 않으면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불편해서 아무리 바빠도, 피곤해도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대본을 쓰고 외웠다. 불필요한 시간을 많이 쓰게 되긴 했지만, 회사에 다닐 때는 그나마 할 만했다. 발표가 매일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가끔 잠 적게 자는 게 감당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대학원에서는 달랐다. 


내가 다닌 대학원은 학기 중에 수업이 거의 매일 3과목이 있었다. 수업 준비 차 읽어야 하는 주제별 사례 연구(케이스 리뷰)가 하루에 두세 개 정도였는데 사례 연구 하나를 읽고 소화하고 분석하는 데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서너 시간이 걸릴 때도 있었다. 오전 9시에 첫 수업이 있고 오후 5시에 수업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새벽 한두 시까지는 다음날 수업 준비로 깨어 있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 과제 준비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버거운데, 그 과제를 발표하기 위한 대본을 쓰고 그걸 통째로 외운다? 악몽이었다. 


(출처: shutterstock)


사실 이건 뭐 악몽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민망하다. 나는 발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잠을 줄여야 했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떨지 않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며 준비하는 발표 대본. 이 얼마나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인가? 발표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 지수가 지구 대기층을 뚫고 나갈 정도였고 계속되는 불안증이 내 영혼을 좀 먹었다. 


시간이 지나도 발표에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고 대본 준비는 계속되었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발표 담당을 피하기 시작했다. 발표를 맡은 사람은 당연히 다른 조원보다 내용을 좀 더 꼼꼼하게 보고 전체 맥락도 파악해야 하고 매끄러운 발표를 위해 별도 준비를 해야 했는데 내가 상습적으로 발표에서 발을 빼다 보니 동기들이 조금씩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출처: shutterstock)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라면 좋았겠다 싶지만, 그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발표 직전까지의 긴장감이 너무 과해서 발표보다는 다른 부분을 좀 더 맡아서 하고 싶어. 괜찮을까?'라고 양해를 구했더라면 어땠을까? 대학원 시절의 나는 온몸에 허세와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터라 발표 불안러임을 고백하는 게 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앓느니 눈을 감아버리자 심정이랄까. 또한 발표 불안증의 속성이라는 게, 긴장하는 내 모습을 극도로 거부하면서 생기는 것이어서 내 초조함을 인정하고 양해를 구한다는 건 판타지 장르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덕분에 나는 80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온 450명의 동기와 교류하고 함께 멋진 시간을 보내고 과목 과목별 공부를 신나게 소화하며 날씨 좋고 아름다운 유럽의 한 도시에서의 삶을 즐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을, 잠 줄여가며 발표 대본 쓰느라 너무 허비를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슬프다. 


(출처: shutterstock)


나는 왜 그리 준비에 집착했을까? 수치심 때문이었다. 긴장해서 ‘발표를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왠지 모르게 싸움에 진 기분이 들었고, 알 수 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이 수치심은 어떤 논리도 이유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빡빡하고 촘촘한 완벽주의를 끌어냈다. 완벽주의가 나를 더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완벽, 흠이 없는 구슬이라는 뜻의 이 단어에 부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함이 없이 완전하다. 세상에 그 무엇이 ‘완전’할 수 있을까? 한 번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지기 쉽다. 그 수치심을 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나 생각을 하기도 한다. 


죄책감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이라면 수치심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 떳떳하지 못한 부정적인 마음이다. '발표 준비를 제대로 안 한 내 행동은 잘못됐어. 그래서 나는 발표를 망쳤어'는 죄책감이고, '발표를 제대로 못 한 나는 바보 같아. 멍청하게 발표를 다 망쳐버렸어'는 수치심이다. 죄책감은 양심과 같은 나의 내적 기준에 기인한 거라면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과 같은 외적 기준에 의한 감정이다. 


'더 준비를 많이 했어야 했는데 소홀했어'는 죄책감, '준비가 소홀했던 내 발표를 보고 사람들이 우습게 봤을 거야'는 수치심이다. 죄책감은 다음 행동에 동기 부여가 되기도 하지만 수치심은 다음 행동을 할 에너지를 고갈시킨다. 어떻게? ‘완벽주의’를 통해서. 완벽주의. 내 수명을 깎아 먹고 내 영혼을 흐려 놓았던 완벽주의. 


발표 불안은 이렇게 영혼을 좀먹는다. 내 영혼을 건강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실수하고 긴장하는 내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실수하는 내 모습, 긴장하는 내 모습을 받아들이는 게, 완벽히 하려고 고군분투하다 수명 깎아 먹으며 바싹 말라가는 것보다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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