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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민 Dec 01. 2024

밀리환초

죽은자와 남은 자 2

환초에 배가 들어온 건 달포 만이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선착장에 도착한 배는 뿌- 뱃고동 소리를 길게 낸 뒤 정박했다. 이윽고 안에서 인부들이 짐을 들고 나타났다. 맨 앞줄은 볏섬을 들었고, 다음 줄은 건어물과 군복 따위의 의류를 내렸다. 섬에서 나온 인부들이 일본군 지휘 아래 운반을 도왔다. 배에서 물건을 나르는 사람도 조선인, 하역을 돕는 인부도 모두 조선인들이었다. 순팔과 동영도 그 무리 속에 있었다. 모처럼 먹을 것을 본 동영은 배가 더 고프기 시작했다. 동영뿐만 아니라 한 달 넘게 굶주림에 시달려 온 조선인들은 어서 빨리 짐을 가져가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지런을 떨었다. 순팔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머릿속에 그리며 볏섬을 어깨에 짊어졌다. 

“물건이 하나라도 없어지거나 잘못되면 네놈을 몫은커녕 목숨까지 사라질 줄 알아라.”

이토의 불호령에 조선인들은 고개를 수그리고 운반에 집중했다. 동영은 뚫어진 볏섬에서 쌀 한 톨이라도 새어 나올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동굴 안 창고에 곡식 운반을 마친 인부들은 바닷물에 땀을 닦았다. 창고에선 아낙들이 물건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남은 이들은 모처럼 배불리 먹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으로 들떴다. 두세 살 먹은 아이들은 숟가락을 쥐어지고 동굴 안을 오가며 밥이 되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솥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밥 냄새가 사방에 흩어졌다. 

“그럼 그렇지. 이 난리 속에 쌀이 워딨겄어.”

강진 댁이 주걱으로 가마솥 뚜껑을 두드리며 한탄했다. 

“백미는커녕 보리쌀도 얼마 읍고, 수수 아니면 씻나락이고, 절반은 모래여라. 밥을 먹으란 건지, 흙을 먹으란 소린지.”

강진 댁 옆에서 마른 생선을 다듬던 순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거들었다.

“죽 보담 낫긴 혀도, 이걸로 또 얼마나 버틸랑가 모르겄네.”

이날 배로 싣고 온 곡식은 잡곡과 흙이 반씩 섞인 볏섬 다섯과 마른오징어 세 축과 생선 일곱 두릅이 전부였다. 

순자의 하소연은 더 이어졌다. 

“사램이 을만디 이걸 수백 명이 먹으라고. 이마저 일본군덜 뱃속으로 들어갈 게 뻔하구만.  근디 머시냐, 아까 군인들찌리 하는 소리 들었는디, 이번이 마지막 배라는 고만요. 그람 우린 워찌 되는 거래요?”

“워찌되긴 뭘 워찌되냐. 디지기 밖에 더 하겄냐?”

강진 댁과 순자가 말을 주고받는 사이 이토가 끼어들어 제지했다. 

“요, 죠센징 년들이 밥은 안 하고, 수다나 떨고 있다니! 오는 네 년들 목구멍에 들어갈 건 물 밖에 없을 줄 알아라.”

이토의 불호령에 두 여인은 납작 엎으려 손바닥을 싹싹 빌고 또 빌었다. 잘못했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이토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아량이란 눈곱만큼도 없는 그에게는 그들의 애원은 바다 위를 흘러가는 바람처럼 공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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