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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밀리환초 02화

밀리환초

죽은자와 남은자

by 류재민

김선재가 죽었다. 장순팔과 김동영이 새벽녘까지 별의 존재를 확인하고 굴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난 한 두시간 쯤이었을까. 그는 그들이 굴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잠들지 않고 있다가 바닷가로 나갔다. 그리고 밀려드는 바닷물에 몸을 맡겼다. 허리춤까지 물살이 들어왔을 때, 그는 죽음을 각오했다. 이미 각오한 죽음이었지만, 막상 물살이 거세게 온 몸을 휘돌자 서늘함에 당황했다. 물결이 턱 밑까지 차 올랐을 때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절뚝이던 다리도 물 속에서 붕 떴다.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졌다. 어미 뱃속의 태아처럼. 세파의 모든 시련이 물살에 떠올랐다. 어린 시절 뛰놀던 순천 앞바다가 떠올랐다. 순천 앞바다에는 꼬막이 많이 났다. 꼬막은 벌교가 유명했지만, 그 시절 순천 앞바다에도 썰물이 지난 뒤 꼬막과 바지락이 천지였다. 어린 선재는 그걸 캐다 집에 가져갔고, 젊은 어미는 그걸 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아버지는 몰락한 양반이었다. 동내 훈장이랍시고 동네 꼬마 녀석 스물을 모아 놓고 천자문을 가르쳤지만, 쌀 몇 되가 노동의 대가였다. 실로 ‘노동’이란 건 알지 못했다.

물살이 이마까지 차올랐을 때 선재는 눈을 감았다. 잠시 눈을 떴지만, 앞이 뿌옜다. 몸은 계속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그의 기억에는 죽은 아비와 어미의 형상이 어렴풋이 맴돌았다.

“인저, 나도 그만 아배, 어매 옆으로 갈라요.”

그렇게 침잠했다. 그는 죽었다.

“할압씨!”

동영은 싸늘하게 젖은 몸뚱이를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선재의 죽음을 뒤늦게 들은 조선인들이 모두 나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장순팔이 장정 서넛과 함께 시신을 수습했다. 죽은 사람들을 수습할 때 쓰던 지게와 거적이 선재의 운구용으로 쓰였다. 돌돌 말아 얹은 가마를 타고 선재는 저승으로 향했다. 별도의 장례는 없었다. 일본군들은 조선인들이 굶어 죽거나, 풍토병에 걸려 죽거나, 물에 빠져 자살했을 때마다 시신을 불태웠다. 하지만 촌장 역할을 했던 선재에게만은 관대했다. 선재는 동굴 위 평야에 땅을 파고 매장했다. 조선시대 풍습을 따라 관을 짰다. 성대한 장례는 아니었지만, 나름 위엄있는 상제가 진행됐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일본군들 역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선재의 죽음으로 조선인들이 혹여나 집단행동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산호초 섬인 환초에선 풀도, 모래도 사막 같았다. 땅은 깊게 파지 못했고, 덮을 흙도 넉넉지 않았다. 얕게 판 땅에 겨우 시신을 묻고, 비석 하나 세우지 못했다. 그렇게 김선재는 쉰아홉에 죽었다.

“할압씨, 죄송하요. 해방되믄 내가 꼭 모시고 고향 땅에 모시고 갈랑게 좀만 참으소.”

동영은 나직이 흐느꼈다. 곁에 있던 조선인들은 숨죽여 흐느꼈고, 그걸 본 일본군들은 총칼을 앞세워 군중을 흩어지도록 했다. 남은 자들은 동굴로 내려갔다. 멀리서 일장기를 단 배 한 척이 환초를 향해 다가왔고, 잔잔했던 파도가 일렁거렸다. 일본군들이 갑자기 부산하게 움직이며 방파제로 향했다.

환초에 배가 들어온 건 달포 만이었다.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선착장에 도착한 배는 뿌- 뱃고동 소리를 길게 낸 뒤 정박했다. 이윽고 안에서 인부들이 짐을 들고 나타났다. 맨 앞줄은 볏섬을 들었고, 다음 줄은 건어물과 군복 따위의 의류를 내렸다. 섬에서 나온 인부들이 일본군 지휘 아래 운반을 도왔다. 배에서 물건을 나르는 사람도 조선인, 하역을 돕는 인부도 모두 조선인들이었다. 순팔과 동영도 그 무리 속에 있었다. 모처럼 먹을 것을 본 동영은 배가 더 고프기 시작했다. 동영뿐만 아니라 한 달 넘게 굶주림에 시달려 온 조선인들은 어서 빨리 짐을 가져가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지런을 떨었다. 순팔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머릿속에 그리며 볏섬을 어깨에 짊어졌다.

“물건이 하나라도 없어지거나 잘못되면 네놈을 몫은커녕 목숨까지 사라질 줄 알아라.”

이토의 불호령에 조선인들은 고개를 수그리고 운반에 집중했다. 동영은 뚫어진 볏섬에서 쌀 한 톨이라도 새어 나올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동굴 안 창고에 곡식 운반을 마친 인부들은 바닷물에 땀을 닦았다. 창고에선 아낙들이 물건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남은 이들은 모처럼 배불리 먹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으로 들떴다. 두세 살 먹은 아이들은 숟가락을 쥐어지고 동굴 안을 오가며 밥이 되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솥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밥 냄새가 사방에 흩어졌다.

“그럼 그렇지. 이 난리 속에 쌀이 워딨겄어.”

담양 댁이 주걱으로 가마솥 뚜껑을 두드리며 한탄했다.

“백미는커녕 보리쌀도 얼마 읍고, 수수 아니면 씻나락이고, 절반은 모래여라. 밥을 먹으란 건지, 흙을 먹으란 소린지.”

담양 댁 옆에서 마른 생선을 다듬던 순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거들었다.

“죽 보담 낫긴 혀도, 이걸로 또 얼마나 버틸랑가 모르겄네.”

이날 배로 싣고 온 곡식은 잡곡과 흙이 반씩 섞인 볏섬 다섯과 마른오징어 세 축과 생선 일곱 두릅이 전부였다.

순자의 하소연은 더 이어졌다.

“사램이 을만디 이걸 수백 명이 먹으라고. 이마저 일본군덜 뱃속으로 들어갈 게 뻔하구만. 근디 머시냐, 아까 군인들찌리 하는 소리 들었는디, 이번이 마지막 배라는 고만요. 그람 우린 워찌 되는 거래요?”

“워찌되긴 뭘 워찌되냐. 디지기 밖에 더 하겄냐?”

담양 댁과 순자가 말을 주고받는 사이 이토가 끼어들어 제지했다.

“요, 죠센징 년들이 밥은 안 하고, 수다나 떨고 있다니! 오는 네 년들 목구멍에 들어갈 건 물 밖에 없을 줄 알아라.”

이토의 불호령에 두 여인은 납작 엎으려 손바닥을 싹싹 빌고 또 빌었다. 잘못했다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이토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아량이란 눈곱만큼도 없는 그에게는 그들의 애원은 바다 위를 흘러가는 바람처럼 공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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