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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민 Dec 15. 2024

밀리환초

강진의 봄2

일연이 잡혀간 뒤로 백련사는 암담했다. 주지를 잃은 사찰은 삭막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적막했다. 상좌와 법사, 거사, 행자 등이 법회를 이어가긴 했지만, 주지를 잃은 절은 평소와 달리 낯설었다. 일경(日警)의 눈을 의식한 듯 신도들의 왕래가 부쩍 줄었다. 시주도 줄었다. 공양주가 어두운 낯빛으로 도감(都監)인 주연 을 찾았다.

“스님, 공양간이 비어 갑니다.”

“으음.”  

주연은 낮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곤 공양주를 따라가 공양간 안을 확인했다.

“며칠이나 버틸 수 있겠나?”

“닷새나 될까요….”

공양주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자, 주연은 다시 한번 긴 숨을 내쉬며 저 멀리 강진만을 바라봤다. 강진만 어귀에 자리 잡은 주재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무관세음보살.”

주연은 일연이 무사하길 바라며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대웅전으로 향한 주연은 108배를 시작했고, 공양주는 쌀독을 열어 콩과 쌀 한 되씩 담아 밥을 짓기 시작했다. 솥은 넓디넓었지만, 내용물은 보잘것없이 적어 초라해 보였다. 그마저도 닷새만 지나면 바닥을 드러낼 것이었다.

그날 밤이었다. 사내 서넛이 도둑고양이처럼 백련사 공양간을 들락거렸다. 발소리도 내지 않으며 민첩하게 움직였다. 사찰 승려든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새벽 아침밥을 하러 나온 공양주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꿈인 줄만 알았다. 휑했던 공양간 한쪽에 쌀이며, 음식이며, 승복이며, 서적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해포는 족히 먹고 쓰고도 남을 양이었다.

“아니, 누가 이렇게 시주를 많이 했을꼬. 나무관세음보살.”

공양주는 대웅전에서 염불을 외우려던 주연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렸다. 주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석가모니불을 올려다봤다. 그리곤 눈을 지그시 감고, 염주 알을 하나씩 굴리며 반야심경을 독송했다. 벌건 아침 해가 강진만에서 떠올랐다. 햇살이 백련사 대웅전에 스며들었다. 빛에 반사된 금색 불상들이 반짝거렸다. 주연의 불경 소리가 법당 안을 가득 채웠고, 의식주로 가득 채워진 공양간 굴뚝에선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주연은 간밤에 공양간을 다녀간 치들이 끌려간 일연과 관계된 자들일 거라고 짐작했다.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항간에는 강진 출신 김찬일이 배후일 거란 소문이 돌았다. 그 말고는 백련사에 그 많은 시주를 할 만한 사람이 없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김찬일은 일찍이 대한독립에 뜻을 품고 독립군에 투신했는데, 그는 김선재의 아들이자 동영의 아버지였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소총을 멘 일본군들이 털털거리는 군용 차량 세 대를 몰고 강진 읍내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사지 멀쩡한 남성들만 골라 태웠다. 서너 살 먹은 어린애부터 칠순노인까지 가리지 않았다. 걸을 수 있으면 다 끌어다 실었다. 그 안에는 선재와 동영도 있었다. 한 동네에서만 서른 명 넘게 붙잡혔다. 반항하는 자들은 개머리판과 군홧발에 맞았고, 도망가는 자들은 총에 맞아 죽었다.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갑작스럽게, 개돼지처럼 끌려갔다. 그들은 다음 날 강진만 하구에 정박해 있던 배에 실려 떠났다. 배 안에는 다른 지역에서 징집된 이들이 백여 명이 넘었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며칠 밤낮 바다를 가로질러 섬에 닿았는데, 그곳이 바로 ‘밀리환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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