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 누아는 가장 뛰어난 통역가이다
시아야 오늘은 꽤 쓸모 있는 개념 한 가지를 알려주고 싶어.
‘떼루아 (Terroir)’라고 하는 개념인데, 와인 동네에선 아주 널리 쓰이는 말이야.
다소 진지하게 와인 이야기를 나눌 때면 늘 빠짐없이 등장하는 개념이라 알아 두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프랑스에서 먼저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꼭 프랑스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떼루아의 개념은 넓게 보면 ‘포도원 환경을 구성하는 자연적인 요소와 포도원을 가꾸는 인간의 지적/문화적 요소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개념이야. 다소 추상적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떼루아의 고갱이는 토양이라고 할 수 있어. 최종 완성품인 와인을 말하기 전에, 포도나무가 스스로 성장에 필요한 양분을 흡수하고 이렇게 자란 포도열매로 만든 와인의 개별적인 특성, 즉 와인의 맛과 향 그리고 색상을 결정하는 요인이 땅 (토양 그리고 토양 아래의 지층)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 떼루아라는 개념이 마치 신앙처럼 거룩하고 소중하게 다루어 지는 곳이 있어. 짐작하다시피 이 곳은 프랑스에 있는 부르고뉴 (Bourgogne)라는 와인 동네야.
부르고뉴 사람들을 프랑스어로 부르기뇽 (Bourguignon)이라고 부르는데, 부르기뇽들은 세상 그 누구 못지않게 그들의 와인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야.
부르고뉴 와인 동네는, 특히 포도밭들이 모자이크처럼 잘게 조각조각 나뉘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어. 다른 와인 동네 같았으면 한 덩어리로 뭉뚱그려서 분류했을 포도원을 부르기뇽들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세분화한 거지.
이런 구분 작업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것은 아니고, 천 년 이상의 긴 시간을 통해서 천천히 세대를 이어가며 이루어 낸 유산이라고 할 수 있어. 자 그럼, 이런 구분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당연하게도 떼루아라는 개념이야. 부르고뉴에서 그들 와인의 개성을 정당화하고, 잘게 나뉜 개별 포도원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떼루아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떼루아라는 한 편의 서사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등장 인물’이 있어.
피노 누아 (Pinot Noir). 바로 부르고뉴를 상징하는 포도 품종이야.
타고난 성격이 까탈스럽고 두루두루 어울려 지내는 성정이 아닌 탓에 기르기가 쉽지 않다고 하지만, 피노 누아 재배에 이상적인 부르고뉴의 풍토에서 만큼은 누구라도 반할만큼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포도 품종이야.
천 년 이상의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포도나무, 포도나무가 자라는 땅 그리고 이를 성실하게 돌보는 사람, 이 셋은 시시각각 쉼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지금의 부르고뉴 떼루아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어.
이런 점에서, 부르고뉴의 떼루아 그리고 포도나무 사이의 관계를 심오하고 멋지게 설명하려는 시도는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나름의 여러 시도들을 많은 와인책을 통해서 보았지만, 사실 아빠의 기억에 가장 또렷이 남은 것은 어느 부르고뉴 농부 (양조가)가 흘리듯 뱉은 “피노 누아는 가장 뛰어난 통역가이다”라는 짧은 문장 이었어.
부르고뉴 포도원의 다채로운 모자이크는 미묘함과 섬세함에 가장 큰 매력이 있는데, 각 떼루아의 미묘하고도 섬세한 차이와 개성을 드러내어 전달하는 어려운 일이 ‘통역가’의 역할인 거야. 불과 2~3 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두 개의 떼루아. 때로는 갖은 토양 분석을 해보아도 와인의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 수가 없어. 분명히 다른 개성의 와인이 빚어지는데도 말이야.
통역에도 차원이 있잖아? 그저 의사소통만 되는 자리나 투박한 의사전달이 필요한 경우에는 완성도가 낮은 통역으로도 통하겠지만, 꼭 필요한 단어나 어조,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말의 위상 등 섬세한 뉘앙스가 중요한 대화에는 가장 뛰어난 통역가가 필요해. 마찬가지로 부르고뉴 떼루아의 섬세한 뉘앙스를 제대로 통역하기 위해서는 부르고뉴에서 오랜 시간 함께한 피노 누아의 섬세함이 필요한 거야. 이런 이유에서, 다른 지역과 달리 부르고뉴에서는 와인을 빚을 때 여러가지 품종을 섞지 않고 오직 한 가지 품종만 고집하기도 해.
포도나무는 땅에서 수분과 영양분을 찾아야해. 포도나무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비바람에 흔들려 쓰러지지 않도록 땅속으로 뿌리를 내려 삶의 중심을 잡는 거야. 땅속으로 뻗은 포도나무의 뿌리는 솜씨 좋은 통역가의 감각 기관처럼 행동하는데, 땅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토양안의 생태계, 땅속 미생물과 뿌리의 상호작용, 생물학적/화학적 반응의 다양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받아들여서 결실을 맺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포도나무. 생명 활동 과정에서 포도나무는 땅이 오랜 세월 여투어 둔 말들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거야. 우리의 생각이 여기까지 가 닿으면 포도나무 한 그루가 예사로이 보이지 않게 되고, 부르고뉴 와인 한 잔을 마시면서 ‘귀’를 더 쫑긋 세우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