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와 범주
“출발선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어딘가에서는 출발해야 한다.”
폴 오스터 『빵굽는 타자기』, 열린책들
매미 울음소리가 한껏 짙어 가는 2024년 어느 여름 저녁이었다. 회사에 새로 입사한 한 동료와 좀 더 알고 지내고 싶어 아빠가 먼저 제안한 저녁 식사 자리였다.
우리 회사의 와인을 판매하는 양재천 거리의 한 와인바로 장소를 정했다. 이 곳은 와인바치곤 드물게 이 십년 이상 오랜 시간을 견디어 낸 양재천의 터줏대감 같은 곳이다. 오래된 나무가 나이테를 켜켜이 쌓아가는 것처럼, 이 곳의 와인리스트는 두껍고 묵직했다.
아빠와 동행한 그 동료는 와인 업계 출신은 아니지만 평소 와인을 즐겨 마신다고 했다. 와인리스트를 건네며 그 분에게 와인 선택을 부탁했으나, 다시 아빠에게 와인리스트가 넘어오고 그러기를 두어 차례. 결국 두꺼운 와인리스트는 아빠의 손에 놓였다. 매우 잘 정리된, 손이 많이 간 리스트였다. 주인장의 관록에 감탄하며, 이리 저리 페이지를 오고 가다 마침 아빠가 평소에 즐겨 마시는 이탈리아 북부 랑게 지역 화이트 와인이 눈에 띄어 첫 와인으로 정했다. 고른 와인을 주문하고 잔이며 얼음이 담긴 통이며 와인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잠깐이지만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먼저 입을 뗀 쪽은 아빠의 새로운 동료였다.
“리스트를 딱 보면 다 아세요? 어떻게 다 아세요? 와, 이 두께에 어떻게 주눅들지 않고 당황하지 않으세요?” 상대방의 호기심 섞인, 어찌 보면 ‘아이스 브레이킹’류의 가벼운 질문이었지만 아빠는 순간 멈칫했다. 전구에 불이 반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되물었다.
“그래, 나는 어떻게 주눅들지 않고 편안하게 와인을 골랐지? 리스트의 와인을 다 마셔본 것도 아닌데. 와인을 안다는 것이 뭘까? 그저 이름을 아는 것? 한 번 마셔본 것?” 결코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냥요, 일하다 보니 익숙해진 거겠죠.”라고 상대에게 얼버무렸다.
와인과 함께한 저녁 식사는 즐거웠고, 와인도 훌륭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즐거운 식사의 기억과 함께 답하지 못한 채 남았다.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무언가를 어떻게 구분하고 기억할까?
거창한 인식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나름의 생각정리는 필요한 것 같아.
예컨대 다른 나라를 안다는 것은 아주 여러 겹의 의미를 가져. 세계의 여러 나라들 중에서 아빠가 그나마 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프랑스. 따져 생각해보니 아빠는 다양한 정보와 상징들 그리고 그간의 제한된 경험을 통해서 프랑스를 안다고 느끼는 것 같아. 국기의 형태와 색, 잘 알려진 음식, 언어, 유적지, 도시, 역사적 사건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유쾌하고 때로 불쾌했던 기억들. 이런 것들을 분류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범주화 하면서 아빠는 프랑스를 안다고 믿는 것 같아. 이미 형태를 잡은 아빠의 분류와 범주 위로 또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더 단단하게 하든지 아니면 재배치 하든지 할거야.
그 날 저녁의 석연치 않은 자기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은 것 같다. 분류와 범주.
아빠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와인들을 구분하고 어떤 계층이나 집단으로 묶는 것 같아. 설령 마셔보지 않은 와인이라 하더라도 와인을 마시는 것 외에 와인이 주는 다른 정보들을 통해서 시도해보는 거지.
어찌 보면 ‘와인을 안다’는 것은 ‘프랑스를 안다’는 것만큼이나 두루뭉술하고 경계가 모호한 것 같아.
와인 서적의 텍스트를 열심히 외워서 최대한 원래 텍스트에 가깝게 다시 쓴다는 것을 두고 와인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와인을 무턱대고 많이 마셔본다고 와인을 잘 안다고 하기도 어려워. 비록 와인을 이론적으로 잘 안다고 해도, 혹은 이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극단적 경험주의자라 하더라도 세상 모든 와인을 다 경험할 수는 없을 거야. 따라서 경험론 만으로는 와인을 안다고 말하기에 부족해. 그렇다고 경험이 빠진 와인 이론이나 사실, 정보 따위들은 주어진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지는 못해. 사실 감각적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 때문에 와인을 즐기는 것인데, 즐거운 감각적 경험이 빠진 채 와인을 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지만 이런 류의 이론과 사실, 정보 등은 ‘분류와 범주’라는 나만의 집을 짓는데 기둥이 되어주고 지붕이 되어주기 때문에 나름의 쓸모가 있어.
시아도 느끼듯이 우리의 주관적 경험은 불완전하고 오류의 가능성이 높아. 이런 불완전한 경험에 기반한 아빠의 분류와 범주는 항상 ‘새로고침’이 필요해. 비록 늘상 ‘새로고침’ 버튼을 눌러줘야 하는 분류와 범주라고 하더라도 쓸모가 있는 것이 일상의 삶에서 즉각적이고 편리하게 기능하기 때문이야.
이런 의미에서 ‘와인을 안다’는 말은 결코 완료형일 수가 없고, 항상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