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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se Dec 11. 2022

[회화] 부드러움과 명암 그리고 따뜻함

<시험 준비> 일리야 레핀, 1864

< Students studying for an exam at the Academy of the Arts , 1864>


번역판으로 된 내 책*에는 <시험 준비>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레핀의 나이 20세. 아카데미 입학 첫 해에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구글에서 찾은 파일이다. 비교적 책과 유사한 톤이지만 채도가 조금 높게 표현된 것 같다. 늘 그렇듯 미술관에 가서 볼 때까지는 원작의 느낌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원작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원작의 느낌은 다르겠지만 전반적으로 저채도에 따스한 앰버톤이 감도는 그림이다.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오는 빛이 부드럽다. 직광이 아닌, 창 너머 건물 외벽의 반사광과 산광이 주된 광원이다. 뒤쪽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얇은 커튼을 투과하여 더욱 부드럽게 벽에 떨어진다. 옅은 보라색 벽지에 만들어진 명암의 그라데이션이 인상적이다. 우측 창문을 중심으로 퍼져있는 하이라이트와 빛이 덜 닿는 곳의 어둠이 만들어낸 밸런스가 좋다. 부드러운 산랑광이 만들어 내는 암부의 풍부한 계조 표현이 이 그림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그래서인지 암부의 비중이 높은데도 그림이 무겁지 않게 느껴진다.


드라마 조명에서 명암의 밸런스는 대체로 인물 감정의 깊이, 씬의 정서 등에 따라 결정된다. 감정이 깊을수록 대체로 암부의 비중, 거친 질감, 강한 콘트라스트 표현이 늘어난다. 가벼운 분위기의 멜로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명암의 표현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밝고 가벼운 인물의 감정을 전달할 때도 명암 표현은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감정의 폭은 매우 다양하다. 그에 맞는 섬세하고 세분화된 명암의 변주는 이미지 자체의 풍성함과 스토리텔링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실제 태양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운 느낌의 광선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드라마 및 영화 촬영감독은 이 부분을 고민할 것이다. 더욱 큰 용량의 광원을 사용하고, 주 피사체와 가능한 거리를 멀리하고, 부드러운 광질을 만들기 위해 커다란 디퓨전을 겹겹이 사용한다. 이 모든 노력은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양의 물리적 조건들을 따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의 제약이 있는 세트뿐 아니라 로케이션 현장에서도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실제 태양 빛에 가까워지기 위해선 무한히 넓은 공간, 큰 광량을 가진 조명기의 활용, 디퓨전을 포함한 각종 부수 장비들, 정교한 세트 디자인과 세팅 시간 등이 필요하다. 결국 제작비의 문제다. 쫓기듯 찍기 바쁜 드라마 현장에서 실제 태양의 리얼리티를 추구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은 주어진 제작비 내에서 늘 최선을 다할 뿐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만큼 제작비가 충분하다면, 그럴 일은 매우 희박하지만, 가능할까. 카메라의 센서가 표현하는 정보의 디테일은 인간의 눈을 지향한다. 괄목할만한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 눈의 인지력을 따라오는 카메라는, 센서는, 없다. 아무리 훌륭한 조명도 태양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듯, 현존하는 그 어떤 디지털 시네마 카메라도 인간 눈이 가진 인지력을 재현할 수 없다. 따라서 눈이 인식하는 이미지와 영상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저 그 폭을 줄이며 자연의 위대함을 최대한 가깝게 좇을 뿐이다.


가장 근접한 해결책은 자연광을 활용하는 것. 실내 세트가 아닌 이상 로케이션 촬영에서 자연광을 이용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실제로 로케이션 촬영에서 자연광을 활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로케이션 회의를 시작으로, 답사를 통해 창문의 위치 및 크기, 해의 위치 및 일조량을 확인하고, 이후 미술작업과 촬영 스케줄 조정 등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 역시 '날씨 운'에 따라 변수가 너무 커서 대게는 즉흥적으로 자연광을 마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시험공부> 에서의 부드러운 빛이 만들어낸, 자연스럽고 풍성한 표현이 그저 부러운 이유다.


촬영 및 색보정 단계에서 소위 웜(warm)과  쿨(cool)의 문제는 대부분 색 영역에서 결정된다. 하지만 명암의 대비도 색 만큼이나 분위기의 따뜻함과 차가움을 표현함는데 중요하다. 빛의 질감, 계조, 콘트라스트 등의 변주가 적절히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한가로이 앉아있는 강아지, 잠을 자는 학생, 창 너머 책을 읽고 있는 여인, 전경의 주요 인물의 표정과 몸짓.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어느 느긋한 하루의 일상은 부드러운 빛이 만들어낸 편안한 명암 계조 표현과 어울어져 더욱 안정되고 따뜻한 정서를 전달한다.


그림 속 벽지, 바닥, 창틀, 기타 소품에서 표현된 오래된질감 또한 부드러운 빛을 만나 디테일이 더욱 잘 표현되었다. 벽지의 보라색, 자고 있는 친구의 바지와 카펫의 붉은색, 창 너머 여인의 푸른색의 색 배분도 흥미롭다. 채도와 명도가 높지 않고 적절하게 보색의 배분을 잘 활용했다. 다만 창 너머에 여인을 그려 넣은 건 세련되지 못한 느낌이 있다. 여인의 시선이 책을 보고 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레핀의 의도가 있었겠지만.



*도서 <천 개의 얼굴 천 개의 영혼 일리야 레핀, 일리야 레핀 외>, 씨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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