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에세이 #1 프롤로그
서른넷 어른 아이
탁!
어두웠던 방안이 노란빛으로 번져간다.
오늘도 진을 뺐다. 부하직원 한 명이 말썽이다. 신경 끄고 살아도 되지 싶지만 책임감인지 오지랖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엄마한테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5초 내로 그만뒀다. 무소식이 희소식인데 뭐.. 예전에는 귀찮아서 전화를 피했다면 요즘엔 울컥거리는 감정이 찰나 하는 순간 올라올까 봐 피하고 있다.
J는 지금 해외에 있다. 직장 때문에 잠깐 해외로 나오려던 계획이 뜻하지 않게 길어졌다.
혼자 사는 건 그녀에게 꽤나 익숙하다.
대학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으니 올해로 벌써 10년 하고도 만 3년 동안 나 혼자 산다를 시전하고 있다. 근데 부끄럽게도 요리경력은 채 1년도 안될 것이다. 오직 나만을 위해 요리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서른 중반,
꽤 열심히 달려왔고 살아왔다
좋은 대학을 나왔고 직장에서도 어린 나이에 일찍 관리직을 달았다.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좋은 집에서 또래에 비해 높은 연봉을 받고 있는 커리어우먼이다. 화려한 연애경력을 자랑하는 그녀지만 아쉽게도 결혼은 아직이다.
그녀는 늘 진심을 다하지만 어리숙한 표현 때문인지 이상한 남자들만 만나는 건지 1년 이상 연애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스무 살 때 열정적이었던 연애는 이제 식어빠진 커피처럼 밋밋하고 미지근하다. 그녀에게 연애는 더 이상 식은 커피와도 같다.
서른이 넘고 나니 주변에 결혼하는 친구들이 늘었다. 조금 일찍 결혼한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는 애가 둘이 있는 집도 있고 초등학교 준비로 바쁘기도 하며 모이면 애들 얘기에 정신이 없다. 남친 욕할 때는 같이 공감할 수 있고 조언할 수 있기 때문에 함께했지만 남편 욕은 끼기 어렵다. 그렇다고 직장을 관둔 친구들 앞에서 상사욕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친구들과의 만남도 멀어졌다.
요즘 그녀는 혼자만의 시간에 집중하는 중이다.
어차피 혼자 지낼 수밖에 없다면 그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나 홀로 여행을 즐기고 혼술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고 있다. 예전에는 친구들을 만나서 열 시간도 수다를 떨 수 있었다면 이젠 한 시간만 이야기해도 때로 지칠 때가 있다. 하루종일 데이트를 해도 에너지가 넘치던 시절에 비해 이제는 반나절만 지나도 집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 만큼 체력이 달린다.
그만큼 내 자아가 강해진 건지 노화 때문인 건지 어쩌면 둘 다 일수도 있겠지만, 남의 비위를 맞춘다는 것이 점점 쉽지 않아 진다.
그래서 혼자가 편하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런 상태.
그렇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물론 주변에 혼자서도 더 즐기며 잘 사는 미혼 언니들이 많지만 J는 아직 부족하다. 그녀는 행복한 가정을 갖고 싶었다. 의지할 수 있는 남편을 만나 기쁜 일은 함께 공감하고 슬픈 일은 함께 위로하며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하고 싶은 동반자를 만나는 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직장에서도 점점 힘에 부친다. 급작스레 맡게 된 팀장일을 책임감 있게 잘 수행해 오던 그녀지만 이젠 책임감 하나로 어필 할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오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좋은 게 좋다고 생각해 오던 그녀였다. 뚜렷한 색이 아닌 회색의 그녀였다. 모두 생각이 다 다를 수 있고 개인의 주관이 있으니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해 오던 그녀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 역시도 의견이나 주장을 강하게 이야기해 본 경험이 많지 않다.
그런 그녀지만 회사는 다르다. 점점 주장과 의견을 세게 강하게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지고,
상대방이 틀리고 내가 옳다는 것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지면서 회사생활이 나와 맞는가 라는 깊은 고민에 빠지고 있다.
겉으로 볼 때는 뚜렷하고 깔끔하고 확실해 보이는 그녀지만 서른넷이 지난 지금도 J는 잘 모르겠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아직도 마음은 복잡하고 어수선하고 위로받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아이와도 같다.
서른넷, 그녀는 아직 어른아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