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장편소설 - 작별인사
민이를 데리고 인도로 갈 거야. 공장 초기화를 시켜달래. 나쁜 기억을 다 지워버리고 싶다는 거야. (..) 가장 완벽한 치유는 기억의 리셋일 테니..
최근에 읽고 있는 김영하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인사>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아직 초반부라 어떤 스토리일지 파악하는 중이지만 대강 흐름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로봇 (휴머노이드) 이 본인 스스로를 자각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이 무엇인지 탐구해 나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소설인 듯하다.
작년에 인생에 '리셋' 버튼이 있다면 꾹 눌러버리고 싶을 만큼 힘겨웠던 시간들을 버티던 때가 있었다. 확실하다고 믿었던 선택이 최악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완벽해 보였던 일상이 한순간에 초라함으로 전락해 버렸던 그 순간. 스스로 버티고 이겨낼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알면서도 이미 생겨버린 마음의 상처는 외면한다고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파혼이라는 단어는 너무 무겁고, 그렇다고 단순 이별로 치부할 만큼 가볍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참고 견뎠을 수 있는 사소한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신뢰가 바닥이 난 상태에서 함께 인생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위험함을 감지할만한 신호는 있어왔지만 애써 무시해 왔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별'을 택했고 지금도 그 선택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만 굳이 몰라도 될 감정들을 경험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만남에 대한 후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선택한 나 자신에 대한 책망이 더해져 인생의 '리셋' 버튼을 자꾸만 찾았던 것 같다.
지금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만큼 단단해지기도 했고 주위의 시선으로부터도 꽤나 자유로워진 기분이다. 물론 가끔씩 울컥하며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긴 하지만, 금세 평온해진다. 글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정답일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 동안 내 나름대로 안정을 되찾기 위해 다양한 심리서적도 읽어보고 처음으로 밋미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나를 찾는 글쓰기>라는 과정도 수강해보면서 당시엔 당장 깨닫지 못했지만 그런 행동들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평온한 나'를 만든 것이 아닐까 싶다.
기억은 리셋시킬 수 없다. 로봇이 아닌 이상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 한 기억은 희미해질망정 리셋이 될 수는 없다. 다만 그 기억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인간인 내가 정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팩트는 경험 자체는 아무 주관도 없고 아무 감정도 없다.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기억은 좋게도 나쁘게도 남게 된다는 거. 나 역시 그랬던 것처럼 리셋시키고 싶을 만큼 최악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작년에 있던 최악의 경험이 앞으로 전혀 생기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 감정 없는, 주관 없는 경험 그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
어렵겠지만, 연습은 필요하겠지만,
나쁜 경험들을 그 자체로 나쁜 기억으로 남겨두지 않으려고 한다. 나쁜 경험을 토대로 나에게 주는 울림을,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나쁜 경험의 '나쁜 감정'은 쏙 빼고, 이 경험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내 성장에 어떤 도움이 될지 무엇을 배울 수 있었는지에 지금부터라도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