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라는 말 한마디에 나 자신이 움추러드는 경험을 하곤 한다. 왠지 모르지만 꼰대가 아닐까 하는 내심의 불안함이 배어있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늘 있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람과의 대화에서 혹시라도 내가 던지는 한 마디의 언어에는 날카로움이 배어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라도 자기 점검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라마 꼰대의 초입에 서 있는 치료 가능한 사람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꼰대는 자신이 꼰대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을 평가하는 타인의 잣대가 고무줄이라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말을 써가며 스스로를 옹호호기에 바쁜 게 사실이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할 수 있는지 주변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겠지만, 그래도 자기 만족도 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위안이라도 될는지. 그래서 많은 꼰대들은 불치병에 걸린 듯 더 이상의 치료법을 찾지 않고, 그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알아서 맞추던지 해"라는 생각으로 사람과 거래를 한다.
너무나 많은 곳에서 꼰대에 관한 연구와 밈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람들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맞춤형 꼰대 치료법이 작용해서 완치에 이르는 사람은 드물다. 왜냐하면 꼰대는 자신이 꼰대임을 자각하고, 그 심각성을 이해하고 개선의 의지가 있을 때 그 치료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흡사 우리 삶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있는 암과 같다고 해야 할까. 암은 발견이 되었을 때 그 치료를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예방을 위한 행위는 사실 찾아보기 힘들다.
말 그대로, 예방활동으로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다. 내가 생각하는 바가 늘 맞다고 느끼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경험치의 농도가 짙기 때문이다. 내가 해본 경험이 늘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그 당시 나만이 이런 경험을 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착각하는 거야 자유라지만, 자신 마음의 평화와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 강하가 나타내는 나만의 경험과 지식의 주장은 착각보다 더한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다.
그런 꼰대들의 특징은 말에 가지가 돋쳐 있다는 거다. 어디서 배웠는지 그래도 기본적으로 사람과의 대화에서 예의는 갖춰나간다. '경청', 대화의 시작은 경청이고, 관계의 시작은 경청이라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듯, 경청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흘러들어 가 결국에는 자신의 꼰대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주장에 이의가 있으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못한다.
사람의 말에는 따뜻함과 뜨거움이 함께 존재한다. 같은 내용이더라도 내가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서 말에는 온정이 배어 있기도 하고, 불처럼 뜨거움으로 사람을 태워버리기도 한다. 가시 돋친 말의 아픔을 넘어서는 사람을 태워버리는 아픔이 배어 있다면,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을 상대에게 선사한다. 이런 게 바로 꼰대에게서 자주 발견되는 '화'의 부적격 사용이다. 때로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넘어서야 하는 논쟁의 다툼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온정과 냉정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꼰대들의 특징이라면 이런 '화'와 '온정'이 차이를 구분 짓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관된 꼰대들의 언행의 취지는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얘기야"라는 것이다. 상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을 아끼지 않고 너에게 다 너에게 털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게 사실 그런 걸까? 그런데 왜 상대를 위해서, 상대가 잘 되기 위해서 하는 얘기 때문에 마음이 타들어가는 걸까. 결국 알고 보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일 뿐이지 상대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는 될 수가 없다.
누구나 될 수 있다.
언어와 다어는 시대의 배경과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바뀌거나 정리되어 간다. 우리가 어려서 배웠던 단어 역시 그 당시 시대적 배경에 따라서 정리되었 듯이, 지금의 단어 역시 바뀌고 있고, 또 새로운 게 생겨나고 있다. 이 언어와 단어는 세대를 구분 짓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세대에게 불편하지만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기도 하다. 앞에서 살펴보았 듯이 꼰대의 등장은 언어학적, 사회학적으로 그 함축된 의미를 명확히 설명하기는 힘들다.
현재 그 나라의 언어를 그 나라의 말로 설명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 국어사전이다. 말에서 비롯된 한국어를 설명하기 위해 국어사전이 존재한다면, 꼰대라는 단어 역시 언젠가는 국어사전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언어에 숨어 있는 의미정도는 정리되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이미 많은 인문학자나 작가들을 통해서 '꼰대'의 의미는 정리되어 있고, 그 어원의 뿌리도 나름 깊이 있게 정리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의미로는 '나이 많은' 정도의 의미가 숨겨 있다. 꼰대에는 오래되고 축척되어 있는 지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내 말을 늘 맞다는 결과치를 정해놓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서 고집을 피우는 행위가 꼰대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기 때문이다. 경험치가 많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나이가 많을 거라는 선입견이 작동하는 부분이다. 정말 나이 많은 사람들만 꼰대로 존재하는 것일까?
회사에 경력 5년 차의 최 OO 대리가 입사했다. 전형적인 MZ세대인 최대리는 무슨 말을 하더라도 자신의 경험 하나를 끄집어내어 사실의 전부인양 말하곤 한다. 회사일 때문에 경찰에 고발해야 할지 고민하는 상황에 놓인 적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최대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리하고 방법을 제시했다. 그 근거로는 자신의 친구가 경찰이라는 점이다. "제 친구가 경찰이라서 이런 거는 제가 좀 알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맹점은 자신의 친구가 경찰이라는 점이 자신의 지식을 보완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때 나는 생각하게 된다. '내 친구는 경찰서 서장이다.'라고 말이다. 최대리의 주장하는 내용에 내 생각을 덮어 씌울까 고민했지만. 나는 참게 된다. 이렇게 또 얘기하다가 결국 꼰대라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서 그렇다.
물론 자신감과 자신이 알고 있는 부분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최대리의 모습을 보며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글쎄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럴까. 최대리는 자신이 젊다는 점을 잘 알고 있고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자신을 알리고 싶어 일과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자신은 시대를 잘 읽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면 다른 분야를 배척하기도 한다. 자신은 이미 충분히 젊기 때문에 자신의 말과 행동이 MZ세대의 당연한 기점이 되고 사회는 이점을 인정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듯하다. 내가 꼰대가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움추러드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내가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깊어져 결국에는 상대의 꼰대짓을 받아주게 된다.
X세대든, MZ세대든 모두가 인정해야 할 답은 여기에 있다. 꼰대는 나이와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그저 자신의 작은 그릇에 담겨 있는 생각이 세상의 전부라는 생각으로 자기 멋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꼰대이다. 세대의 구분을 짓지 말고, 나이가 많던 적던지 간에 나도 꼰대가 될 수 있고, 때로는 이미 꼰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젊기 때문에 내가 하는 생각과 말, 그리고 취해는 태도는 'MZ세대는 이렇다'라는 기본적 사고의 토양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불치병인 'MZ꼰대'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