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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압살롬 Jul 14. 2023

사랑에 관한 일기

우매한 사랑

우매한 사랑

     

“무엇보다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따금씩 무릎을 꿇은 악인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려 본다. 악인의 참회는, 그가 악행을 가한 사람에게 향하지 않는다. 저지른 행위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은 오로지 그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살아가다 보면 느끼게는 수치와 후회 그리고 나약함조차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일부로 이해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사랑은 불완전한 순간에도 일어나는 열정이기에, 또 우리 안의 취약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완성되기에,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      


할머니는 살아계실 적에, 나를 앞에 두고 집안에 얽힌 연애사를 종종 들려주셨다. 젊었을 적 할아버지는 준수한 생김새와 정 많은 성격 탓에 쉽게 치정문제에 얽혀 들었다. 항상 집을 지키던 할머니와 잠시도 집에 붙어 있을 수 없던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붙박이장과 산바람 사이의 사랑이라며 할머니를 위로하곤 했다. 칠십 년간 이어진 결혼 생활 내내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다정도 병이라며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의 성품을 자랑스럽게 여기곤 하셨다. 하지만 사랑도 미움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날이 오면,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자신에게 고하듯 지나친 사랑에 관한 우화를 들려주었다.       

    

할머니의 여동생에겐 사랑하는 남편이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이루어졌기에, 두 사람의 앞날에는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약속된 듯하였다. 하지만 서로를 원하는 마음만으로는 과거가 남긴 상처를 완전히 이겨낼 순 없었다. 여동생의 남편의 내면에는 일상의 평안만으로는 억누를 수 없는 기억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살아있는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연거푸 술을 마시거나 시비에 휘말리며 되풀이되는 과거와 싸우고 있었다.


할머니의 여동생은 사랑하는 이의 침범할 수 없는 과거로 인하여, 또 그의 달랠 길 없는 혼자만의 고통으로 인하여, 남편을 잃고 말았다. 할머니와 여동생은 오갈 데 없는 여성의 처지와, 남편조차 위로할 수 없는 아내로서의 무능함을 자주 비관하곤 하였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여동생을 기다리던 어떤 날에, 할머니는 여동생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여동생은 남편이 묻힌 산비탈에 올라 재차 산 아래로 몸을 굴렸다. 지나가던 조문객이 그녀를 발견했을 땐, 여동생은 남편의 비석에 머리를 맞댄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여동생의 지나친 사랑을 어리석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를 이해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랑에 정성을 다하면 안 된다고, 가슴을 치받는 사랑은 언제고 일을 낸다고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전하는 할머니의 고요하고 평안한 얼굴 때문에, 마치 여동생의 명예로운 죽음을 자랑스레 여기는 듯한 목소리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목숨을 담보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여기게 되었다.      

오늘 이런 별스러운 주제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그만큼 별스러운 의문 때문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볼 때면, 언젠가 저 사람을 위해 크게 져 줄 수 있는 날이 오길 소망했다. 칠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이 관계 속에서 상대를 위해 지켜온 가치관을 버린 쪽도, 삶의 방향성을 완전히 뒤엎은 것도 모두 나였지만, 나는 여전히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내가 상대를 향하는 만큼이나, 상대방도 나를 향해 전력으로 달리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져주고픈 마음은, 받은 사람에 대한 부채감이 아닌, 여남은 마음의 빈공만 마저 상대에게 바치고픈 마음 때문이다. 그저 내가 쏟는 마음에 부족함이 있을까 하는, 스스로를 향한 미심쩍은 마음 탓이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했듯, 붙박이장 같은 사랑을 주는 당신에게 나는 어떤 바람인가, 자문해 본다. 함께하는 일상과 약속된 미래, 그리고 흔들림 없는 신뢰. 당신은 자신이 소망한 것을 나에게 주고, 당신의 소망이 나에게 이르러 약속된 사랑이 되는 것을 본다. 당신은 그렇게, 지난한 삶의 고단함에 보복하듯 나와의 행복을 희구한다. 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주는 것이 한없는 행복이라 해도, 나는 받는 사랑에 큰 가치를 둘 수 없다. 빈틈없는 사랑이란, 목숨마저 내어줄 수 있는 것이기에. 희생은 사랑의 일부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사랑이 미심쩍을 때 대어보곤 하는 시금석이기에, 나는 여전히 주는 사랑을 꿈꾼다. 그저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마음에 그치지 않고 줄 수 없는 것조차 주려는 사랑. 할머니는 사랑이 깊어지면 평생을 소진할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래서 내가 결코 줄 수 없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래도 나 자신, 소중히 가꿔왔고 치열히 지켜낸 나의 자아가 아닐까. 나는 나를 너무도 사랑한 만큼. 또 나 자신을 대가로는 아무것도 타협하지 않았던 만큼 나는 나 자신을 사랑을 위해 주고 싶다. 물론 이런 마음을 기꺼워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언젠가 가볍게 웃으며 이 부담스러운 선물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그런 시련의 순간이, 우리에게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명예가 되길 소망한다.      


할머니의 여동생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에, 그 생명을 허락한 사람들에게 악인이 되었다. 그녀의 남편 또한 좋은 사람일 수 없었다. 그는 전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였기에, 또 그가 죽인 이도 누군가들의 사랑이었기에, 그는 죄인이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저지른 죽음에 대해 변명해야 한다면, 또 후회해야 한다면, 그것은 서로의 앞에서 뿐이다. 진실된 고해는 사랑 앞에서만 가능하다고, 할머니의 편안한 얼굴이 말해주었다.


사랑이 허다한 허물을 덮을 때, 우리는 각자의 나약함보다 사랑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인간이 강해지는 것은 가장 취약한 사랑 앞에서 뿐이라고, 나는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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