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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압살롬 Dec 22. 2023

나는 내 코끝을 보려 해요



자기에 대해 말하는 행위는, 제 눈으로 자기 코끝을 보려는 몸짓과 다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아등바등하는 꼴이 우습기도 하지만, 그런데도 제 코끝을 보려는 시도는 매우 의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에게 분명히 감각되지만, 볼 수 없는 그 자리에 스스로에 대한 진실이 매달려 있을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페이퍼에서, 저 자신의 코끝을 저보다 빨리 볼 수 있는, 또 저로 하여금 제 코끝의 존재를 일깨우는 어리고 난삽한 학생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지금 저는 텍사스의 한 주립 대학에서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토종 한국인이 어설픈 영어로 원어민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비결은, 그저 미국이라는 나라가 작문 수업에 대하여 한국과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무엇보다 작문을 모든 학문의 기본으로 여기는 미국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수사학 수업은 인문학에 대한 낭만적 기대가 넘실대는 현장이기도 하지만, 학생들로서는 동의 없이 이루어지는 무례한 수업이기도 합니다. 현장의 이런 분위기 탓에, 제가 약 1년 반 동안 경험한 미국 작문 교육의 현장은 때론 무례하고 때론 공손한 학생들과 함께하는 자기-이해 수업이었던 것 같습니다.    

  

텍사스는 아주 적나한 의미에서 미국적인 지역입니다. 다양하고 무분별하며 활력과 돈이 넘치는 지역입니다. 젠체하는 교양인이 적은 이곳 텍사스에서는, 여유롭지만 무식한 백인들과 절박하지만 영악한 이주민들이 함께하는 듯 떨어져 살아갑니다. 첫 수업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서너 명의 학생들이 제게 다가옵니다. 대체로 첫 수업 이후에 저를 찾는 학생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저와의 관계를 희망하기보다는 향후 성적에 대한 만족할만한 거래를 기대하는 아이들입니다. 하지만 오늘 제가 나누고 싶은 학생들은 이런 평범한 학생들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저를 시험에 들게 하는 그리하여 제 코끝을 보게 하는 아이들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보통 수업의 첫 진단 과제로,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개인 경험과 직접 닿아있는 사회적 문제를 서술하라고 요청하곤 합니다. 그리고 거론한 사회 문제에 대해서 학술적 증거를 찾기보다는 그와 관련된 개인 경험을 분량제한 없이 묘사하라고 요청하곤 합니다. 아무래도 텍사스가 IT 기업들의 새로운 보금자리이자 멕시코의 접경지역 그리고 백인 남부 정신의 요충지로 자리하다 보니, 이곳의 학부생 수업에서는 인도와 멕시코에서 이주해 온 이민 1-2세 대의 자녀가 많고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보수적인 백인 아이들이 균형 잡힌 비율로 함께하곤 합니다. 그렇다 보니 아이들의 진단 과제에는 가벼이 웃어넘기기 어려운 이주의 역사, 인종 학살, 약물과 총기, 그리고 여러 정체성을 향한 투쟁들이 일상적인 언어로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인생을 이고 지고 온 아이들의 앞에서, 저는 어색한 영어를 구사하며 그들을 글쓰기라는 주제로 한 자리에 아우르고자 합니다. 아이들은 그런 저를 선생이라 순진하게 부르면서도 때론 잔인한 마음으로 제게 무엇인가 구체적인 삶의 대상을 투사하고는 합니다. 제가 지난 시간 동안 배운 것은, 대학생들의 강사가 된다는 것은, 주저함 없는 열정으로 저에게 무엇인가를 투사하는 학생들 앞에서 아무런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과정을 제 영혼이 굳어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어린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누르는 법을 터득하는 유연화의 과정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어쨌든 끔찍한 무능력의 한 복판에서, 저 자신을 빈 잔처럼 대하는 법을 터득할 때마다, ‘아 나는 열려 있으려 이 자리에 온 것이구나’를 되뇌곤 합니다. 그리고 약에 취한 학생에게, 무엇인가 다른 존재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학생에게 오늘의 안부를 묻곤 합니다. 그러면 학생은 제게 헤픈 미소를 지으며 답하곤 합니다. “I’m fine, Ma’am, just roaming around with my friends, no big deal.” 과제 마감이 있기 전날이면, 최소 두 세 명의 학생들이 차 사고로 응급실을 방문하고, 꽤 많은 사촌이나 친척들의 부고를 접할 수 있습니다. 제게는 그들을 의심할 권한이 없지만, 다행히도 그들에게 사실 증명을 요구할 권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관둔 지 오래입니다. 진단 평가에 쓰인 아이들의 경험은, 이방인인 저에게 어떤 새로운 관용과 새로운 환대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저에게 있어 제가 감상하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주인공들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살아있는 어린 영혼들로서 제가 그들을 안을 준비를 하기도 전에 한순간에 자신을 열어젖히곤 합니다. 제가 그들은 완전히, 아니 온전히 껴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말입니다. 교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학생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가르치는 사람이기 전에 그들의 앞에서 그들을 온전히 바라봐줄 수 있는 한 명의 어른으로 서 있습니다.      


모호한 회색지대의 위험 속에서, 분명 저는 제게 마련된 제도로 저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 뒤에 서는 선택에 대해서 아직 주저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저 자신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그들을 지나치게 믿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동기들은 제게 아이들의 선의를 믿느냐고 묻곤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저는 그 누구보다도 깊이 아이들의 의도를 의심하는 자입니다. 저는 그저 제가 아이들 앞에서 질 수 있는 책임에 대해서 셈할 뿐입니다. 한국에서 경험한 선생님들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서도 아니고, 텍사스에서 공유하고 있는 교사의 개념에 따라서도 아닙니다. 그저 저는 제 내면에 존재하는 선생이라는 이데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번 봄학기에는 유독 문제 학생이 많았습니다. 총 네 명 정도 되는 학생들은 모두 이민 2세대로 부모 세대와 이런저런 이슈가 많은 아이이었습니다. 네 명의 학생 중에서 세 명의 학생이 중독 문제가 있었고, 그중에 한 명은 수업 시간 내내 학칙에 어긋나는 발언들로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을 관리하던 AK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학생을 퍽 좋아했습니다. 매번 수업에 늦긴 하더라도 수업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보이던 학생이었고, 문제 행동 이후에 이루어지는 개인 면담 시간에도 줄곧 공손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 친구의 특약사항은 다른 문제아들을 보살피는 더 심각한 문제아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때로 AK가 다른 친구들을 챙기느라 수업에 빠져도 저는 그의 결석 사유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일 친구를 위하여 응급실에 있다는 AK의 주장을 의심한다면, AK는 수업을 포기할 것이었으니까요. 상처가 많은 아이들은, 교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를 찾는 데에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판적 감각을 번뜩이곤 하였습니다. AK가 수업을 포기하는 편이 저에게는 더욱 이로운 것이었지만, 저는 제 교수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를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AK는 학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B라는 성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AK에게 B학점을 주기 위해서 AK의 결석을 무효화하고, 그 무효화를 정당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학생들의 결석을 무효로 했습니다. 그래서 애초 3번의 결석만을 용인하던 제 수업은 학기 말에 이르러 6번의 결석을 용인하는 여유로운 수업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또 이 반에는 에릭이라는 다른 학생이 있었습니다. 에릭은 약물 중독은 아니지만, 심각한 담배중독으로 고생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에릭도 AK처럼 교우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던 학생이었는데, 강사로서는 수업에 보람을 주는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에릭이 수업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 그날의 수업 자료가 학생들에게 흥미로운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에릭은 분명하고 솔직한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대게 솔직하고 자유로운 학생들이 그러하듯이 에릭 역시 출석을 가장 어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에릭은 수업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학생을 보지 못한 지 3주 정도가 흘렀을 무렵에 저는 교실 바깥에서 저를 기다리는 그 친구를 마주합니다. Eric은 절친한 친구의 자살 때문에 수업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친족이 아닌 그 친구의 죽음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증명할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에릭의 주저하는 태도에서 약간의 거짓을 발견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는 그에게 남은 수업에서 얼굴을 비춰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문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그 친구의 말을 검증할 능력은 없었지만, 남이 쓴 이야기를 읽듯이 그의 고통을 하나의 허구적 사실로 인정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학생의 이야기의 결말은, 제가 이 두 학생으로부터 받은 강의평가로 마무리됩니다. 사실 강사의 미래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이 강의 평가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중대한 권리 표현으로 여겨지고도 합니다. 또, 익명으로 진행되지만 어쩌면 강사에게는 여러 방식을 통해서 실명 평가일 수 있는 이 학기말 평가에서 저는 AK에게 F를 받습니다. 우습게도 이번 봄 학기에 제게 공식적인 강의평가를 남긴 학생은 AK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강사로서의 제 자질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저의 값어치에 대해 반문하는 AK의 코멘트는, 이 평가를 남긴 것이 다른 문제아라고 짐작했던 저 자신에 대한 가장 정직한 평가였을지도 모릅니다.      


에릭은 괴로웠던 면담 이후에도 종종 수업을 빠졌지만, 그는 이따금 괴로운 얼굴로 느지막이 제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에릭은 아무 말도 어떤 학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 날, 제가 이 지면에서 거론하지 못한 다정하고 특별한 아이들과 아쉬운 인사를 마무리하고 난 뒤에, 에릭은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에릭은 모두가 떠나고 난 자리에서, 저를 한 번 안아보아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상스럽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저는 에릭을 오 분 남짓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에릭은 저에게 모두가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 때 자신을 믿어주어 감사하다는 이메일은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날 이후로, 에릭을 마주친 기억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고, 종합되지 않은 채로, 저는 이번 학기에 또 다른 AK와 에릭을 마주합니다. 여러 의미에서 저는 여전히 학생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저의 판단을 의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악의를 셈할수록, 제 앞에 서 있는 아이들과 저 사이에 놓인 격차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저 아이들보다 나쁜 삶을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언제나 저는 저들보다 앞서 사는 사람, 선생인 것입니다. 이제야 저는 학생들을 윤리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기보단 미학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장미처럼 제 앞에 피어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저를 위해 피어있는 것이 아님에도, 저는 저들을 아름답다 느끼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장미가 나름의 방식으로 아름답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 따라 특별히 환하게 피어난 몇 송이가 저의 마음을 끄는 것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저는 항상 제 코끝을 그들의 순간에 들이대고 힘껏 들이마시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게 제가 행할 수 있는 문학적인 이해이고, 어른으로서의 관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당겨 안기 위해 팔을 벌립니다. 입을 맞추고자 들여다본 망막 표현에 제 얼굴 상이 맺혀 있음을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망막 속에는 제 코끝의 모양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너무 깊이 끌어안으면 보이지 않는 서로의 코끝을 깨닫고, 더 가까이 몸을 당겨봅니다. 제게 허락된 100일이라는 시간 동안, 저와 아이들은 서로 얼마나 가까이 당겨 안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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