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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덤보 May 17. 2024

장마는 마침내 그친다

구병모 <아가미> 를 읽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큐레이션
구병모 소설 <아가미>


장마는 마침내 그친다.



아가미는 여름날 장마 같은 소설이다. 비 오는 유월의 어느 밤, 도서관에서 빌린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적막하게 젖어들어갔다. 그 후로 종종 여름이 그리워질 무렵에는 아가미가 생각난다.


인간과 물고기, 그 사이에 어드메의 존재인 '곤'은 둘 중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불안정한 삶을 살아간다. 곤에게는 두 명의 식구가 있다.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은 곤을 품어준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인 '강하'다.


촌구석에서 근근하게 살아가는 노인과 손자, 그리고 신분조차 없는 고아. 셋은 나름의 유대를 형성하며 살아간다. 조금 특이한 건 곤과 강하의 관계다. 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할아버지와 달리 강하는 그를 고기 새끼라 부르며 멸시한다. 그러면서 곤을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 돈을 모은다.


곤은 물고기가 강을 찾듯 계속해서 헤엄을 친다. 소설 속에서는 곤이 물속을 헤엄치는 모습에 대해 꽤 자주, 또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 대목에서는 인물들에게 깔린 불행이 잠시 씻겨져 내리는 듯하다.


불행이 깊어진 건 강하의 친모가 찾아오고 나서다. 남자에게 속아 모든 걸 망친 채 내려온 고향에서 약에 빠져 살아가는 그녀. 이제 약은 한 달을 버틸만치 남았고, 그것이 아마 그녀의 남은 생일 것이었다. 그 사이 그녀와 친해진 곤은 그녀를 구제하려고 약을 모두 버린다.

그리고 그 선택이 최악의 결과를 낳는다. 환각에 빠져 곤에게 매달리는 여자, 아비규환 속에서 곤은 그녀를 살해하고 만다.


잔잔하던 우울이 장마처럼 쏟아져 내린다. 강하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도망치는 곤, 곤을 필사적으로 도망치게 돕는 강하. 쫓기듯 떠난 곤은 몇 년 뒤, 폭우에 휩쓸려 할아버지와 강하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부모 대신이던 할아버지와 애증의 관계 강하. 존재의 유일한 증명이던 둘을 한 번에 잃게 된 것이다.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는 없다. 다만 곤은 둘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세상의 볕이 들지 않는 곳에 살아가는 인물들에게 불행은 어쩌면 피하기 어려운 장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인물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우산이 되어주며 내일의 이유를 만들어간다. 마침내 장마는 그쳤고 이제 곤은 강하와 할아버지의 시체를 찾기 위해 헤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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