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관종의 탄생.... 나는 억울할 때 글을썻!
2014년,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해 동하를 입양했을 때 나는 남편과 함께 입양 가족 행사에 참 부지런히도 참여했었다.
나는 입양 가족들이 모이는 지역 모임에도 시간을 내어 곧잘 참석했었는데, 입양 부모로서 선배들의 경험을 듣고 입양된 아이들이 잘 자라는 모습을 보고 배우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두 살에 첫 육아를 시작했지만 입양 부모들 사이에선 어린 편에 속했고,
무엇보다 결혼을 하고 입양을 하기까지의 시간이 굉장히 짧은 편이었다.
('안 생기네? 그렇다면!' 하고는 바로 입양을 결정한 속전속결의 여인과 아내 의견을 적극 존중하고 함께 해준 남편)
그리고 딸에 비해 아들을 입양하는 비율이 현저히 낮았기 때문에 나는 동하로 인해 생전 처음 경험하는 세계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바로 매스컴이다.
당시 '중앙입양원(현 아동권리보장원)'에서는 입양 인식개선활동과 홍보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주로 이 곳을 통해 입양부모 인터뷰 또는 촬영 섭외 등이 이루어진다.
입양부모들이 모이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내가 올린 글과 사진을 보고 중앙입양원에서 입양 캠페인 영상에의 출연을 권유하셨다.
2016년이었다.
이런 경험이 전무한 데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라 양가 부모님에게까지 전화하여 상의를 했다.
'가족을 못 찾는 아이들도 많다는데 뭐라도 도울 수 있으면 해야지'가 대다수의 의견이었고 마침 가까이 지내는 동하와 동갑내기 여자 아기를 입양한 엄마와 함께 섭외가 되어 조금은 쉽게 결정하게 되었다.
입양 인식 개선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 나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바야흐로 흑역사의 탄생이다.
메이크업해주신 언니는 상냥하고 친절했지만, 반 묶음과 짙은 화장이 내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 않으셨다.
코디는 또 어땠는가.
내 몸을 구겨 넣으니 옷의 모든 주름이 사라졌던 작디작은 스판 청바지에 글래디에이터 스타일의 하이힐, 그리고 팔은 짧고 짜임은 굵은 니트를 착장 해주셨다.
아마 촬영 때 꽃게처럼 계단을 오르내렸다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방송 촬영인데 거울 속 내 모습의 메이크업과 코디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빨리 끝내고 이 옷과 메이크업을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촬영 중 또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KBS 방송국이었다.
5월 11일, 입양의 날에 내보낼 뉴스를 위해 섭외를 했고 정말 급하게 그날 방문을 하여 촬영을 했으면 한다는 것이다.
살면서 방송출연은 커녕 사람들 앞에 나서 본 적도 없던 나인데 2016년 봄부터 이런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유독 엄마인 내가 주 인터뷰이(interviewee)로 섭외가 되었다.
우리보다 일찍 입양을 하고 자녀를 키우는 선배 부모들이 어디 어느 방송에 섭외되었다던가, 어느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는 후기글을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면서 '와~ 저런 거 떨려서 어떻게 하지?' 했는데 입양 부모라면 자연스레 겪는 수순 같은 것이었나?
첫 번째로는 아이들에게 이것이 도움이 될 것인지, 두 번째로는 말을 잘하지도 못하고 녹음된 내 목소리는 정말 듣고 싶지 않은 것이 고민의 결정적 이유였다.
동공에는 지진이 일어나고 대뇌가 요동을 쳐야 정상이지만 공익광고 촬영 중이라 너무나 정신이 없던 관계로 오래 통화를 하면서 거절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알겠다고 수락한 뒤, 촬영 끝나자마자 집에 갔는데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그 지독했던 신부화장은 지우지도 못하고 인터뷰를 했고 마치 인터뷰를 위해 미용실에서 풀메이크업을 받고 온 것 같은 영상이 송출되었다.
(그래도 코디당한 옷을 벗고 머리라도 묶어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
나는 보지도 못했는데 뉴스를 본 지인들의 전화와 문자가 속속 도착했다.
친한 친구들은 놀려대기 바빴다.
"아, 김지인 방송 출연한다고 풀 메이크업한 거 봐"
"신부화장 뭔 일이야?"
그리고 입양 사실을 몰랐던 지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와, 몰랐어요. 정말 존경해요."
"감동했어요, 대단해요."
그 뒤로 나는 입양 홍보가로 활동하는 젊은 입양부모인 것처럼 입양부모 커뮤니티 사이에서 알려져 갔다.
의도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입양 가족 커뮤니티 사이에서 일 뿐이었고 생각보다 우리 가족이 나온 공익광고나 뉴스를 본 사람이 많지는 않은 듯했다.
CGV 영화관에서 상당기간 종종 대형 스크린에 상영했었다는 공익광고는 정말 가뭄에 콩 나듯 봤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마저도 내가 입양 가족으로 출연한 것이 아니라 후원자 또는 일반인으로 참여한 것인 줄 알았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둘째 동주를 입양하면서 우리는 중앙입양원과 방송사 기준, 더더욱 입양을 홍보하기 좋은 '아들을 둘이나 입양한 젊은 부부'가 되었다.
그 사이 한번 정도의 뉴스 인터뷰 섭외가 더 있었고 이번엔 EBS였다.
게다가 무려 다큐멘터리라고 했다.
세상에, 인간극장 BGM이 머릿속에 펼쳐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네.
이렇게 어울리지 않을 수가!!
처음엔 손사래를 했다.
사실 살다 보니 정말이지 살기에도 바빠서 우리 부부는 입양이란 단어를 거의 떠올리지도 못하고 살고 있었다.
동주는 그 해 7월에 와서 한창 적응하며 지내고 있었고 동하는 동하대로 갑자기 형이 되는 바람에 질풍노도의 4춘기를 경험하고 있는 데다가 나는 종일 쌓인 기저귀와 삶아야 할 젖병에 둘러싸여 간신히 숨만 쉬고 있을 때였다.
남편은 남편대로 집안일에 정신이 없었다.
반복되는 일상뿐인 우리에게 무슨 감동 스토리가 있고 사연이 있겠냐고 말씀드렸다.
입양을 주제로 한 콘텐츠의 필수 요소가 바로 감동 스토리이지 않은가 말이다.
특별한 사연이 주는 울림으로 보는 사람들의 마른눈을 촉촉하게 적셔줄 그런 입양가족이 필요할 테고 그게 우리는 아니라는 확신.
그러나 결국은 출연을 승낙하게 되었고 두 분의 PD님, 카메라 감독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며칠간 동행하며 촬영을 진행하게 되었다.
TMI 여담
양가 부모님 중 한 집 정도는 방문하는 촬영 계획이 있는데 마침 포항 시댁에 갈 일이 있어 멀긴 했지만 제작진 두 분을 모시고 장거리를 가게 되었다.
한참을 달려 2시간 정도의 거리만을 남겨두고 포항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접했다.
중간 휴게소에서 만나 어찌할지 상의를 했다.
시댁 상황을 알고자 몇 차례 전화를 시도했고 어머니께서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셨다.
우선, 많이 놀라셨고 집안도 집기가 깨지고 넘어지면서 엉망이라고 하셨다.
결국 제작진들을 회차하여 서울로 가시고 우리만 부모님을 모시러 포항에 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파트에서 거리가 있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 남편이 부모님을 모시러 간 사이에도 여진으로 차가 울릴 때는 아이들과 함께 땅 속으로 가라앉기라도 할까 봐 너무 무서웠다.
그 후에도 몇 번의 지진이 발생하기에 어머니께 가까이 이사오 실 것을 권유드렸다.
"저희 집으로 오셔서 함께 사세요. 안방 비울게요!"
"얘, 너네 집 가서 살면 너네는 일하러 가고 애들에, 집안일이 천진데 내가 그거 다 하러 갈 일 있니?"
어... 어머니... 저.. 정답(?)
대차게 퇴짜를 맞았다.
그 해 12월 22일 성탄특집으로 '입양, 행복한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포함한 총 세 입양가정이 출연한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본 방송으로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본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몇 주 뒤 유튜브에 각 가정별로 주요 장면 편집본이 올라갔는데 그 영상의 링크를 지인이 보내어 확인했을 땐 이미 수십만 회가 조회된 영상이 되어 있었다.
방송으로 본 사람보다 알고리즘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입양 사실에 대해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말을 안 하려고도, 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육아 얘기는 거의 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우리 가정의 이야기를 그 영상을 보고서야 알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썸네일이 이렇게 귀여워서 조회수가 많았을 것이라고 이 어미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