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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익 Feb 14. 2022

<장미의 기사>와  카를로스 클라이버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의 지휘 스타일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 Strauss)의 오페라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 피날레를 클라이버의 버전으로 들어 보다가 문득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의 지휘를 보고 또 연주를 들으며 느낀 바 중 일부를 약간의 비유를 빌려 표현해 보고자 한다.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작품 해석론과 지휘법은 타 지휘자들의 그것과 명징하게 구별된다. 그러나 이단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무척이나 진실되다. 이는 그가 인습에 의존하지 않고서 치밀하게 악보를 분석하고, 그 나름의 내적 필연에 의지해 작품을 다시 조립해 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타 지휘자들의 해석과 지휘법을 모방하지 않는 클라이버의 연주를 들으며 짐짓 놀라다가도 그 설득력과 관능미에 압도당해 '이 곡은 이렇게 연주되어야만 했다'고 믿기에 이른다. 마치 다른 지휘자들 앞에서 침묵하던 악보가 클라이버의 손을 탄 뒤에 스스로 웅변을 하게 된 양태와도 같다. 그의 지휘법(비팅, 리허설 방식)은 어떠한가? 과시적이기보다는 진솔해 보인다. 그의 몸짓은 음악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그의 심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지휘자 베토벤과 브람스를 연주하면서 이토록 혼돈을 품고서 춤추며 별을 노래하는 영혼을 그려내지 못한다. 유일한 대항마라면 푸르트뱅글러가 아닐까.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클라이버는 순간순간 영롱하고도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만 그 충동이 작품의 흐름을 망가뜨리는 일은 결코 없다. 그의 눈은 독수리가 날아올라 산과 계곡, 광야를 내려다보듯이 작품 전체를 조망하고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미의 기사>가 담고 있는 양가적인 영혼 -- 즉 모차르트의 영혼과 바그너의 영혼 -- 을 그토록 섬세하면서도 탄력적으로 표현해 낸 지휘자가 또 있을까. 난 푸르트뱅글러를 경외하는 만큼이나 클라이버를 경외한다. 클라이버가 완벽성에 몰두한 나머지 레퍼토리를 크게 확장시키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지만, 제 영혼에 적절히 들어맞는 곡과 그렇지 않은 곡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분별할 줄 알았던 그의 혜안이 오히려 대단할 따름이다.


위의 비유적인 설명을 납득시킬 만한 예시를 소개해 보려 한다.


내가 근래 그의 연주 중 가장 자주 들은 브람스 4번 교향곡부터 소개해 본다. 클라이버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준 곡인 만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Deutsche Grammophon에서 1980년에 녹음한 스튜디오 음반이 워낙 유명하지만, 1979년 빈 필하모닉과의 실황 연주도 탁월한 것은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이 실황 녹음을 더 선호한다.


브람스 교향곡 4번 실황(1979), 클라이버 지휘.


4악장의 파사칼리아 구조를 이렇게 관능적이면서도 질주하는 영혼을 빚어내 듯 연주하는 지휘자를 나는 보지 못했다.



다음은 내가 위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한 <장미의 기사> 1979년 실황 비디오다. 클라이버는 이 곡을 단골 레퍼토리로 자주 무대에 올렸지만 정작 스튜디오 녹음은 하지 않았다. 그 점이 아쉽긴 해도 영상에서는 오히려 배우들의 연기 함께 감상할 수 있으니 좋다. 1994년 실황 비디오도 유명하지만 1979년 버전을 더 높게 쳐 주는 경향이 있다더라.  

<장미의 기사> 실황(1979), 클라이버 지휘.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품이고 그마저도 일부분만 드문드문 감상한 것이기는 하나, <장미의 기사> 피날레의 트리오와 듀오 파트는 내가 '낭만적 사랑'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삼중창과 이중창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작품이 내가 가장 편애하는 오페라가 될 수도 있다. 낭만적 연애에 대한 나의 원형적 심상이 이 짧은 순간 안에 다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극의 줄거리가 그렇다기보다는 음악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를 가장 강렬하게 매료시킨 몇 가지 지점이 있는데 대강 이 정도로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 때로는 가슴을 절절하고도 아리게 만들면서도 때로는 가슴을 뜨듯하게 위로해주는 낭만적 사랑의 원형 심상을 빚어낸 듯한 음악이라는 점. 슈트라우스의 천재적인 작곡이 클라이버의 생동감 넘치는 연주와 만났다.


2) 극의 마무리 직전 첼레스타를 활용한 점, 그 이후의 익살스러운 마무리가 극의 음악 및 줄거리 전체를 신비스러운 동화로 완성시켜준다는 점. 첼레스타가 이렇게 사람을 눈물 나게 하는 악기인 줄 왜 몰랐을까. (그러고 보니, Richard Strauss의 후계자 격으로 여겨지는 Franz Schreker의 <Der Ferne Klang(아득한 울림)>에서도 마무리의 첼레스타가 모든 분위기를 영롱하면서도 신비스럽게 만들지 않던가) 마치 어렸을 적 눈이 빠져라 보았던 사랑스러운 동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3) 줄거리도 꽤 좋다. 옥타비안을 사랑하기에 그를 놓아준 마르살린, 그리고 두 연인의 아름다운 노래를 넋 놓고 듣고 있다가 문득 들려오는 첼레스타의 소리,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떨어진 손수건이나 주워 주는 시종의 모습까지 완벽하다. 비록 현실적인 윤리에 어긋나는 지점들이 몇 군데 있지만 그 모든 걸 초월하고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동화의 마무리 같다.


4) 남자 주인공이 테너가 아니라 소프라노라는 점이 맘에 든다. 테너가 소프라노를 잡아먹을 듯이 포효하는 오페라가 마침 질릴 즈음에 이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은 천운이다. 테너가 소프라노를 점령하려 들고 소프라노도 그에 질세라 강렬히 질러대는 이중창에 질렸다. 근데 이 곡은 참 다르다. 삼중창과 이중창 모두 여성들이 배역을 맡아서인지 너무나 달달하고도 포근하게 노래를 한다. 연기는 거의 간지러울 정도로 달달하다. 플라시도 도밍고 같은 테너가 옥타비안을 맡았다면 저 분위기가 살지 못했을 것이다. 정확한 자료로 확인을 해 보아야겠지만, 듣기로는 슈트라우스가 리브레토 담당자인 폰 호프만스탄과의 조율 하에 일부러 옥타비안 캐릭터에게 남자가 맡을 수 없는 음역대를 할당하여 여성이 옥타비안 역을 맡게 했다고 한다.



어쩌다 보니 위에 올린 두 클립이 모두 1979년 영상이다. 클라이버 옹.. 79년에 열심히 일하셨구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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