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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익 Feb 15. 2022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브람스 <교향곡 4번>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빈 필하모닉 연주, 1979년, 빈 무지크페라인 홀.


아래 게시글에서 언급한 1979년 빈 무지크페라인에서 열렸던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를 맡고 빈 필하모닉이 연주를 한 공연의 일부다. 실황 연주 음반 중 브람스의 교향곡 4번 1악장 부분만 오려 왔다.


처음 이 실황 연주를 들었을 때에는 주의 깊게 듣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활력적인 흐름이 매우 특징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기억을 곱씹고 뜯어볼수록 범접할 수 없는 명연이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이 곡을 해석할 때 아예 기존의 지휘자들과는 구별되는 음악적 심상을 그려냈던 것 같다. 우수에 찬 영혼들이 줄을 지어 묵직하면서도 질주하는 듯한 춤을 추는 듯하다. 대위적인 요소들을 이렇게 심정적으로 깊이 몰입한 채로 풀어낼 수 있다니, 거장은 거장이다.


이 연주를 계속 듣노라면,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춤을 추는 영혼'이라는 메타포가 떠오른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지휘자인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공통점은 악보의 재현이 아니라 재창조의 관점에서 작품을 접근을 한다는 점, 놀라울 만큼 일관되고 풍부한 내러티브(또는 플롯)를 산출해낸다는 점, 음악이 마치 제 발로 걸어 나와 춤을 추듯 연주를 한다는 점 등이다. 춤추는 영혼이라는 심상을 산출해 내기 위해서는 음악적으로 녹록지 않은 설계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상상적인 대담함과 더불어 그 대담한 심상을 소리 또는 소리의 형식으로써 풀어내기 위한 치밀함이 필요하다. 또한 기계적인 반복을 피하기 위한 즉흥적 광기도 요구된다. 이러한 복잡한 설계가 무대와 관객 사이의 공간 그 어디선가 펼쳐지고 우리는 그 경험을 '감상'한다.


 

사소한 특이점을 지적해 보자면, 1악장의 제 1주제부에서 첼로가 연주하는 모티브 일부(위 동영상에서 00:35~00:36)가 유달리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지휘자들, 심지어는 클라이버 본인의 다른 연주들에서는 이 선율이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 으레 접하게 되는 연주들에서 강조하지 않은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예컨대 음악적 일관성을 해치게 되는 경우라든지), 이 연주에서는 오히려 바로 이 강조가 1악장의 비장미를 살려 주는 매력 요인으로 작용한다.


듣다 보면 마음속으로 춤을 추게 된다. 브람스가 교향곡을 하나 작곡할 때 최소 몇 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가며 숙고에 숙고를 거듭해 치밀하게 설계했다는 점과 그렇게 복잡하게 작곡된 곡들은 대개 청자들로 하여금 인지적 혼란에 빠지게 한다는 점을 모두 고려한다면, 클라이버의 이 연주가 이 대난곡을 얼마나 생생해 살려 내고 있는지를 다시금 칭송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장미의 기사>와 카를로스 클라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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