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그림자 드리우기'
: 진실을 말하기 위한 고투
2021. 06. 28.
<포즈를 취한 마리 테레즈를 모티브로 작업하는 조각가> 1933 파리서 제작, 동판에 에칭
마리 테레즈의 '깊은 그림자'
피카소 탄생 140주년 기념전을 보고 왔다.
가장 큰 소득은 바로 위의 그림, <포즈를 취한 마리 테레즈를 모티브로 작업하는 조각가>(1933)을 알게 된 점이다.
내가 느끼기에, 이 그림에서 인상적으로 여겨야 할 부분은 바로 '그림자'(음영)이다.
그림은 두 인물의 관계성에 집중한다.
'조각가'는 아마도 피카소 본인을 은유하는 상징적 인물일 것이다. 그림 속 조각가는 '모델', 즉 마리 테레즈의 진실된 상을 포착해내려고 애를 쓴다.
흥미로운 점은 마리 테레즈의 주변에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그림자 씌우기' 작업에는 피카소의 표현적 의도가 있다.
그림자의 의미를 나름대로 전유적으로 해석하면서 이 작품을 감상하고자 한다.
성스러움: 신비, 은밀함, 에포케(epoche)
성스럽다고 여겨지는 진실은 무릇 신비와 은밀함을 내포한다.
에밀 뒤르켐, 루돌프 오토 등 성스러움의 특질을 논의한 과거의 학자들은 모두 진리가 '은밀함'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신비롭다
광활한 빛 아래 그 대상의 실체가 다 드러나는 순간 그 대상의 신비는 사라진다.
신비로운 것은 숨겨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파울 첼란을 빌린 피카소 해석 :
'그림자를 드리우라, 진실을 알기 위해서'
피카소에게 마리 테레즈는 하나의 신비였고, 은밀한 성스러움이었다. 마리 테레즈의 깊은 그림자는 피카소가 보내는 동경의 표현인 셈이다.
피카소는 그 신비로움이 주는 미지의 감각을 그림자로나마 간신히 표현해내려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그림에서 그림자의 깊이는 대강 이런 의미를 내포한다.
조각가가 모델에게서 느끼는 (혹은 모델에게 부여한) 경이로움, 신비
미지의 대상에 대한 사랑과 관심
진실과 끊어지지 않으려는 열망
그와 관계를 맺으려는 인식론-존재론적 욕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델을 감히 통제할 수 없다는 겸손함
그런 의미에서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것은 epoche(판단 중지)를 선언하는 것이다. 나의 식견과 그의 겉모습만으로 그의 '존재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위이다.
시인 파울 첼란이 진실을 말하기 위해 스스로에 '그림자를 드리워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파울 첼란의 시 "그대도 말하라"의 한 구절.
"그림자를 충분히 드리우라
그것에 충분히,
네 주위를 둘러싼
한밤과 대낮과 한밤 사이를 나누어 알 수 있을 만큼
(...)
그림자를 말하는 자, 진실을 말한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에게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다. 그런 진솔한 탐구적 자세와 열망이 감상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뜨겁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있어서 마리 테레즈,
즉 그림자를 드리우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아직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