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의 문화 전통은 장구한 세월을 거쳐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고 영속해 온 복잡계(complex system)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복잡계는 공학자의 의도에 따라 설계된 복잡한 기계(complicated machines)와는 거리가 멀다. 복잡계는 오히려 유기적인 의미에서 자기 스스로를 하나의 안정적인 체계로 조직하는 생명 창발 현상에 가깝다. 문화 전통은 개개인의 '마음의 습속(habits of mind)'에 뿌리내리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 조직적 창발을 통해 개인을 넘어 사회의 차원에서 기능한다. 이런 점은 복잡계의 주요 정의들과 맞닿아 있다(Davis et al., 2015/2021, p. 287).
‘종교에 대한 공화국의 우선성’ 또는 '공화적 가치 뒤에 숨은 기독교 전통'을 근거로 공립학교 내에서 히잡의 사용을 금지한 프랑스의 문화 전통도, ‘남성 무슬림의 수양을 돕기 위한 여성의 헌신’을 근거로 여성에게 히잡의 사용을 강제한 이슬람의 문화 전통도 하나의 복잡계라고 볼 수 있다.
'히잡 착용 금지' 논쟁은 복잡계 간의 구조 접속
히잡의 착용을 둘러싼 유럽 내의 갈등
문화 전통이 결코 하나의 헌법 조문 또는 종교경전으로 축소되어 이해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복잡계적 특성 때문이다. 문화 전통은 자기 영속적인 실천의 힘을 갖는다는 점에서 단지 종교경전이나 헌법에 아로새겨진 문장이 아니다. 시스템은 자기 자신을 영속화하기 위해 개개인을 전쟁터로 몰아넣기도 한다. 문화 전통이라는 시스템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다른 복잡계가 만나 접속하면 두 체계의 자기 영속적 실천력이 맞부딪히며 체계 간 대결의 구도가 펼쳐진다. '히잡을 학교에서 착용해도 되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프랑스 교육당국 또는 무슬림 학생에게 사활을 걸어야 할 고지전이다.
복잡계 평가는 중층적으로 접근해야
사회현상의 중층적 구조(nested structure)
문화 전통이라는 것이 복잡계의 성질을 띤다면, 문화 전통에 대한 관찰과 평가 역시 그에 맞게 복잡성을 띨 필요가 있다. 이때 관찰과 평가의 복잡성이란, 현상의 다양한 층위를 오가면서 그것의 중층적 존재성을 살피는 것을 뜻한다. 문화 전통을 하나의 층위에서만 바라보는 것은 결코 온전하고 충실한 해석이 될 수 없다. 예컨대, 학교에서 히잡 사용에 관한 논쟁을 단지 ‘기독교 대 이슬람’, '자문화 중심주의 대 다문화주의'의 대결로 보는 것은 사태의 복잡성을 축소시키는 일이다.
복잡계를 이해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문화 전통을 평가할 때 적어도 세 가지 층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Ibid., p. 291).
(1) 문화 전통이라는 하나의 단위체 그 자체를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의 수준은 다른 수준에서 나타나지 않는 고유한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2) 이 단위체가 다른 단위체 또는 더 큰 단위체와 어떤 접속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찰의 층위를 확대해야 한다.
(3) 하나의 단위체를 구성하는 하위 시스템 간의 연결 관계를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찰의 층위를 축소해야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층위를 모두 고려한다면 히잡 논쟁은 으레 신문지상에서와 같이 간단하게 읽힐 수 없다.
복잡계로 히잡 논쟁 읽기 (1): 시스템 자체 레벨
꾸란 24, 33장
(1) 이슬람이라는 문화 전통 그 자체의 수준에서 히잡을 다루는 방식을 보자. 무슬림 여성이 히잡을 착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꾸란 제24, 33장이 여성으로 하여금 히잡을 쓰도록 하기 때문이다. 종교문화 전통의 근거가 전통 그 자신이라는 점에서 이는 일종의 '재귀적 반복 과정'이다.
'재귀적 반복' 또는 '재귀적 정교화'는 복잡계의 대표적인 자기 생산방식이다. 문화 전통은 자기의 권위를 영속화하는 도구로 이러한 재귀성을 활용한다. 종교경전의 준수 여부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존재 여부를 결정짓는 사회에서 한 개인이 히잡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듯 히잡 문화는 그 타당성에 대한 의식적 검토 없이 구성원이 당연히 따라야 할 초안정 시스템으로 자리매김한다.
복잡계로 히잡 논쟁 읽기 (2): 시스템 외부 레벨
히잡 vs. 십자가
(2) 이슬람이라는 단위체와 프랑스라는 단위체 간의 접속 관계를 들여다보자.
백인 학생이 십자가 장식의 목걸이를 한다고 해서 프랑스 교사가 그것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십자가 장식이 내포하는 기독교 문화가 프랑스 헌법의 정교분리 정신보다 더 깊숙이 서구 문명 곳곳에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잡은 상황이 다르다. 프랑스 문화에서 이슬람은 어디까지나 주변부적이다. 이 경우, 히잡 착용 금지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횡포가 될 우려가 있다.
그러나 히잡 논쟁을 관찰하는 층위를 이슬람이라는 단위체 그 하위로 좁혀 들어가는 순간, 해석은 반전된다.
복잡계로 히잡 논쟁 읽기 (3): 시스템 내부 레벨
내면화된 억압
(3) 이슬람 내부의 차원에서 들여다보자.
이슬람 전통에서 히잡은 명백히 여성을 남성이 누리는 특권적 지위로부터 소외시키고 심지어는 여성 간에도 차별과 소외가 이루어지도록 만드는 억압의 도구이다. 쿠란 제24장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장식을 가려야 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최적의 도구 중 하나가 히잡과 부르카 등 이슬라믹 베일(Islamic Veil)인 것이다. 남성이 수양을 실패한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히잡은 남녀 간만이 아니라 여성 간에도 차별을 야기해왔다. 히잡은 ‘지체 높고 순결을 유지한’ 여성과 그렇지 못한 여성을 구분함으로써 후자의 여성을 하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프레이밍 툴로 기능해왔다. 이러한 억압은 여성이 무슬림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히잡을 착용하게 되는 결과로 피드백되었다. 우리는 히잡을 통해 ‘자발적인 자기 억압’ 또는 ‘억압의 내면화’가 발생하고 지속되는 순간을 목도한다.
히잡이 이슬람 문화를 구성하는 하위 개체인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별을 매개하는 핵심 도구라면, 우리는 히잡을 탄압받는 소수자의 문화로 간주하는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의 문화 전통을 이해하려면 그 존재성을 결정짓는 다양한 층위를 두루 살펴보아야 한다. 사태의 중층성을 살피는 복잡계적 감수성 없이는 복잡한 사회현상을 결코 충실하고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다문화시대가 예견되는 앞으로의 한국에서도 이러한 복잡계 사고가 중요한 시민생활 역량 중 하나로 다뤄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