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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기C쁠 Feb 26. 2024

지극히 사적인 글쓰기

그 근원을 찾아서

2023년 6월, 포르투갈 포르토

자발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게 언제일까 되짚어보니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중학생 때였던 듯싶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준비하면서 오늘은 이 과목을 공부하겠다는 정도의 수준.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가 실제로 몇 시간을 공부했는지 함께 기록하면서 조금 더 자세해졌다. 아마도 어느 유명한 인터넷 강사가 알려준 방법을 따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내가 오늘 무슨 옷을 입었고,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한테 먼저 문자가 왔다는 둥 시시콜콜한 하루 일과의 나열장이 됐다. 이 무렵 싸이월드 이용이 매우 활발했고, 자연스럽게 일기를 쓰는 무대가 나를 아는 모두에게 활짝 열린 공간으로 옮겨졌다. 이 시절의 일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기였다. 감정 표현은 독자를 의식한 수위로만, 때로는 누군가를 저격하는 글도 쓰는 등 아주 유치한 방식으로 표출됐다. 


싸이월드 쇠퇴와 맞물려 일기장은 다시 개인적인 공간 됐다. 여담이지만 이무렵 스타벅스에서 매년 나오는 다이어리를 집착적으로 모은 것도 일기 쓰기 캠페인에 한몫했다고 본다. 입사 후부터는 매일 일기장을 붙들 마음의 여유가 없어 생각이 많아질 때만 펜을 잡곤 했다. 손가락이 아파올 정도로 글을 써내려 가다 보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감정을 갖고 있고 가 정리가 됐다. 내 상태가 이렇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순간이다. 나름의 자기 객관화 과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기와 같은 사적인 글쓰기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내가 이 주제로 쓰겠다고 소재를 결정하는 순간부터 가치가 개입된다. 이 일기장은 나만 본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누군가 들쳐볼 수 있다는 생각에 무의식 중에 자기 검열도 생긴다.

중학생 때부터 쓴 일기장들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장 격했던 2020년 일기장은 대체로 비어있다. 해외 근무를 준비하면서 바빠진 영향도 있겠지만 2019년의 일기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내 생각을, 나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생각을 은밀하게 감추고 싶었던 영향이 크리라. 그 생각을 글로 구현하면 과거의 나를 정의할, 혹은 판단할 근거를 남겨놓는 셈이니까. 그랬던 일기장을 다시 채워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외국 생활을 시작한 2021년부터는 다시 펜을 잡기 시작했다. 가족도, 친구도 전무해 기댈 곳이 없는 완전한 타지에서 예전의 내가 그래왔듯 내 생각과, 내 의견과, 내 성찰과, 내 감정을 포착할 수 있으면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는 자책은 들지 않을 테니.


참고로, 펜을 잡기 힘들 때는 컴퓨터 자판기라도 두드려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브런치와 인연이 시작됐다. 처음 가입할 때만 해도 글을 발행할 꿈도 꾸지 않고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놨었데, 이제는 나의 생각으로 달여낸 글들이 누군가에게 읽히길 바라 발행 버튼을 누르고 있다.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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