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부임을 앞두고 했던 몇 가지 결심 중 하나는 한국인과는 연애를 하지 않겠다였다. 3년 뒤에 다시 한국에 돌아오면 한국인을 만날 수 있을텐데 굳이 파리에서까지 그래야 하나 싶었던게지. 이런 결심이 무색하게도 그곳에서 한국인 남자친구를 만나 지금까지도 연애하고 있는 걸 보면 인생에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확신이 든다. 물론 이 친구와 만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2명의 프랑스인과 만나보면서 나는 프랑스인과 연애는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어쩌면 다소 편협한 결론이 깔려있다. 고작 2명을 만나보고 성급한 결론을 내렸다는 비판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만 연령대가 다르고 직업도, 성장환경도 상이한 이 두 사람과 연애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은 주목할만하다고 본다.
우선 첫 번째 공통점은 초반에열과 성을 다한다는 점이었다.한국에서 만나본 그 어떤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반 공세가 거셌다. 세상에 이보다 다정한 사람은 없겠구나 싶을 정도로 공을 들인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잘 모르는 단계에서 굳이 나를 집으로 초대해 직접 요리를 해준다는 게 신선한 다정함으로 다가왔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을 적에는 본인이 가정적이라는 점을 어필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 글을 쓰다 보니 파리의 비싼 외식비도 아끼고 잠자리를 유도하려는 일석이조 효과를 노린 게 아니었나 하는 의심도 든다.
에펠탑 연작
또 하나의 공통점은 어장에 들어온 순간 연락이 잘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대면하거나 통화를 할 때면 연애 전선에아무 지장이 없다. 하지만 연락을 주고받는 간격이 눈에 띄게 늘어졌다. 한국에서의 연애는 아침에 눈을 떴다가 밤에 잠들기 전까지 카카오톡 메시지에 얽매여있다시피 하고, 나 또한 여기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이 두 남자들의 소통방식에 당황했다. 처음에는 내가 극복해야 하는 문화 차이로 여기며 삭히기를 여러 번 반복하며 내 속만 타들어갔다.
한 친구는 승무원이었는데 외국으로 비행을 간다는 언질도 없이 떠났다가 연락이 안돼 -그래봤자 몇 시간이지만- 걱정하게 만들곤 했다. 기내에서 와이파이가 항상 되는 건 아니라며 항변하는데, 아니 미리 알려주면 될 것 아냐?한번은 친구들이랑 밤새 술을 마시며 노느라 연락을 못했다며 나의 간섭이 숨막힌다는 식으로 불만을 토로한 적도 있다.또 다른 친구는 늦깎이 학생이었는데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내리들었고 그사이 친구 집에 가서 점심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거나,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느라 바빴다는 변명을 하곤 했다. 서로가 이해할 수 없는 연락 패턴을 극복할 의지가 없었던 나는 두 번 모두 이별이라는 가장 편한 선택지를 골랐다.
(프랑스인과 결혼했거나, PACS로 묶인 한국인들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면 본인들도 다르지 않았다며 크게 공감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묘한 위로를 얻는동시에연인 관계를 이어 나가는 그들을 보면서 결국 이건 함께 허들을 넘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고 나는 의지박약으로 후자였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에펠탑 연작
더 골 때리는 건 관계를 정리한 이후였다.시간이 한참 지나서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락을 하는 게 이 둘의 세 번째 공통점이었다.한 친구에게너 나랑 자고 싶어서 자꾸 연락하는 거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은 적이 있다. 그러고 싶지!라는 쾌활한 답변에 정이 뚝 떨어졌다. 미안한데, 난 그렇지 않다고 하니 그다음 말이 더 가관.
왜, ○○ 너는 공식 남자친구하고만 자는 거야?
Oh-là-là. 동방예의지국 출신답게 그간 우회적으로 거절 의사를 표시해 왔던 나는 까딱하면 전투라도 치르겠다는 심정으로 각을 잡고 말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자. 그리고 나는 너를 이제 좋아하지 않아.
그랬더니 돌아온 답은 C'est dommage! 애석하단다. 자신은 늘 여기 있을 테니 외롭거나하면 언제나 연락을 달란다! 다정도 병인가 싶어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선을 확실히 그었다.그 이후 한 차례 더 내 이름을 발랄하게 부르는 메시지를 받았지만 응답을 하지않았다.
두 번째 친구는 나이가 더 들어서 그런지 다시 계속 반복적으로 연락하는 이유를 더 그럴싸하게 포장했다. 나는 너라는 인간을 좋아했고 그 감정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그래서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문득문득 궁금해질 때면 문자를 보내는 거라고. 나를 좋게봐주는건 고맙지만, 한 번 데어보니 두 번은 같은 짓을 하고싶지않아 작별을 고했다.
어렸을 때는 구남친의 '자니?'류의 메시지를 받으면 약간의 우월감을 느꼈던 듯 싶은데 두 사람의 잦은 연락은 처음 몇번만 가슴을 살랑살랑 간지럽혔을 뿐 이내 짜증을 뿜어내는 스트레스 유발 버튼이 됐다. 그런 불쾌한 감정들은 이제 모두 증발했고 내가 만난 프랑스인들처럼 거절당할까두려워 말고 일단 내 마음을 적극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해야겠다는 삶의 태도만이 남았다. 역시 모든 연애는 어떤식으로든 가르침을 남기나보다. 고맙네,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