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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Oct 31. 2020

쉬운 동양 철학 14

이간  VS 한원진

이간은 인성과 물성,  인간의 본성과 동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한다. 이간의 주장을 접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혹감을 느끼기 쉬울 것이다. 주변 사람들  누구도 개나 비둘기 같은 동물의 본성이 인간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간 본인도  지키는 개를 보면서 개의 본성이 자신과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간이 이런 당혹스러운 주장을 하게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경험적이고 자연과학적인 시선이 아니라 특정 형이상학을 맹신하여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송시열을 숭상하던 충청도 노론은 대부분 주희의 에피고네(자손, 후예, 모방자, 계승자) 자처하고 있던 유학자들이었다.

주희는 자신의 주해서에서 자신의 논의를 ‘성즉리(性卽理)’라는 기본 원리를 재차 강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만물은 ()라는 원리와 ()라는 원리를 통해 발생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음양과 오행이란 () 모여서 만물의 형체가 만들어지고, 형체가 만들어지는 순간 () 함께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물에는 건순과 오상이라는 윤리적 덕목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건순은 음양이라는 기에 () 부여되면서 생기는 덕목이라면, 오상은 오행이라는 기에 () 부여되면서 생긴 덕목이다. 비록 구별되어 보일지는 몰라도 건순과 오상은 모두 동일한 ()  가지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희가 사물의 형체가 어떻든 간에  사물에 내재하는 (),  본성은 모두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간은 주희의 사상에 따라 음양오행으로 상징되는  가운데 “바르고 소통되는기를 얻으면 사람이 되고, “치우치고 막힌기를 얻으면 동물이 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간은 이런 기의 차이 때문에 () 차이가 난다고 생각해선  된다고 보았다. 그런 그였기에 동물의 본성과 사람의 본성은 같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이간에게 인간성과 동물성은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잔잔한 물이든, 흐르는 물이든, 맑은 물이든, 탁한 물이든 이간은 다양한 달그림자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늘에 떠있는 둥근 달만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마음에는 현상 세계의 다양성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극단적으로 사람이니 돼지니 말이니 꽃이니 하는 것은 그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간의 인물성동론은 동물성을 긍정하는 논의로 읽혀서는  된다. 그에게는 동물도 심지어 인간도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세계를 낳은 일원적 원리,  () 혹은 태극만이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같다는 이간의 주장에 대해 한원진은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결코 같을  없다는 관점으로 논박했다. 그렇다면 지금 한원진은 주희의 이일분수를 부정하는 것일까?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원진도 이간과 마찬가지로 주희의 에피고네를 자처했던 유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일분수를 부정하지도 않으면서 또한 동시에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한원진의 글을 보면 그도 역시 이일분수라는 도식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있다. 하지만 그가 주목한 것은 고요한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흐르는 물에 비친 달그림자가 동일한 달을 반영하고 있더라도, 결국  가지 달그림자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달이 완전하게 둥근 모습을 띄고 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달이 흐르는 물살 때문에 찌그러지고 심지어는 찢어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원진은 고요한 물과 같은 “빼어난 ”,  수기를 얻었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과 달리 완전한 ()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인간만은 인의예지신이라는 덕목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훼손하지 않고 실현할  있다는 것이다. 반면 동물은 흐르는 물에 찢어진 달그림자 모양의 경우처럼, 인의예지신이라는 덕목 가운데 일부분만을 실현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증거로 한원진이 들고 있던 사례는 호랑이나 이리가 인의예지신 덕목  인만을 실현하고, 벌이나 개미는 의만을 실현할  있다는 사실이다. 이간이 성즉리를 원리적으로 맹신했다면, 한원진은 ()이라는 글자와 ()라는 글자를 함부로 바꾸어 써서는  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물의 종류에 따라 달그림자도 천차만별이다. 수많은 달그림자들이 결국 하나의 달을 가리키고 있다고 이간이 생각했다면, 한원진은 하늘에 떠있는 하나의 달이 아니라 달그림자들에 주목한다.

주희는 () 측면, 그러니까 개체가 가진 육체적 측면에서 사람과 동물을 비교해보면 오히려 유사하다고 이야기한다. 사람이나 동물은 모두 외부 사물들을 지각하고,  외부 사물에 대해 특정한 운동을 하거나 혹은 욕망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면 그는(주희 인지 한원진인지 모르겠다. 맥락상 한원진일 것이라 추측) () 측면에서 보면 사람과 동물은 같을 수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동물은 “하늘로부터 받은 인의예지를 완전하게 실현할 없지만, 사람들은 인의예지를 완전하게 실현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동물도 인의예지로 정의되는 본성을 인간과 마찬가지로 갖고 있다는  전제하는 논의이다. 다만 동물은  부여받은 본성을 완전하게 실현할  없다는 , 주희가 <<맹자집주>>에서 말하고자 했던 점이 바로  점이다. 결국 한원진의 생각과는 달리 <<맹자집주>>에서 주희가 주목했던 점은 존재론적 차원이 아닌 수양론적 차원의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있겠다. 주희가 사람과 동물이 다르다고 말한 이유는 사람과 동물의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만이 수양을 통해 인의예지를 모두 실현할  있는 반면. 동물은 건순오상의 덕을 모두  제대로 실현할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의 본성은 같을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이라는 윤리적 제도를 만들고 지켜나가려고 노력하는 이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희가 말한 수양을 통해 습득된 결과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인간과 동물은 본능적인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무 데서나 자고 아무 데서나 싸지는 않는다. 이것은 본성이라기보다 학습된 결과인  같다.

한원진 초상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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