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데우스와 노란 가을

운명

by 무심한 째까니

욕실 타일에 까만 점이 꼬물거린다. 가을 모기가 극성이라던데. 쥐고 있던 샤워기로 물을 쏘려다 멈칫했다. 작은 거미가 물기를 피해 위로 기어가고 있다. 물이 없는 곳으로 옮겨 주고 샤워를 끝냈다. 슬리퍼를 신고 수건으로 머리를 닦다 발등에 까만 부스러기가 묻어 있는 게 보였다.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짧은 다리가 둥근 몸뚱이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다. 물을 피해 들어간 곳이 슬리퍼 안이었나 보다. 아, 그렇게 운명(殞命)하는 게 그 거미의 운명(運命)이었을까?


그러면 나는 어떤 초인간적인 힘에 이끌려 이들과 여기 있을까? 11월 어느 날, 저녁 일곱 시 30분, 서울. 연극이 시작되기 전 컴컴한 무대를 보며 오른쪽에 큰애, 왼쪽에 송쌤과 황쌤이 앉아 있다. 무대 중앙을 강하게 비추는 조명의 유도대로 우리는 거기에 시선을 모은다. 새벽 기차로 올라와 큰애와 하루 종일 용산, 혜화 주변을 쏘다녔더니 종아리가 뻐근하다. 조명을 받으며 살리에르 역의 박호산 배우가 휠체어를 타고 나온다. 드디어 연극 <아마데우스>가 시작되었다.


“우리 서울 갈까요?” 하고 말한 이가 송쌤인지 황쌤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한마디에 서로의 일정을 확인하고 넉넉하게 날을 잡았다가 기다리는 게 너무 지루해 다시 날짜를 조정했다. 갑작스러운 서울행에 남편 눈치가 보였지만 큰애도 보고 오겠다는 핑계를 댔다. 익산까지 따라온 진한 안개가 연극 빼고는 딱히 정한 게 없는 우리의 시간 같다. 서울역까지 마중 나온 큰애가 팔짱을 끼며 웃는다. 새벽부터 서두르길 잘했다. 선생님들은 연극 시간에 맞춰 만나기로 한 터여서 여유가 있었다.


아이는 꼭 보여 주고 싶다던 카페로 나를 이끌었다. 그곳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파란 인형이 곳곳에 놓여 있다. 천장과 벽을 장식한 마른 가지들이 어두운 공간을 더욱더 음침하게 했다. ‘에고, 귀신 나오게 생겼네.’ 어떠냐고 묻는 딸아이에게 귀엽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초등학교 때나 앉던 나무 의자에서 커피를 마시며 재잘거리는 딸을 바라봤다. 코트 안에 입은 얇은 셔츠가 자꾸 눈에 거슬린다. 점점 추워질 텐데. 서울을 북극쯤으로 생각하고 겹겹이 입고 온 내게 아이의 얇은 옷은 헐벗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를 데리고 쇼핑몰에 갔다. 발열 내의 두 장과 도톰한 웃옷을 사주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무대 위 모차르트는 악보의 음표처럼 쉴 새 없이 피아노 위를 오르내리며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자신에게는 모차르트와 같은 재능을 주지 않았다며, 신에게 종주먹을 들이대며 울부짖는 살리에르의 절규에 공감하다 보니 어느새 155분의 긴 연극이 끝났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큰애를 바래다 주러 다 같이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낮에 보았던 노란 은행나무가 불빛보다 환하다. 시골 마을의 당산나무 같은 나무들이 서울 거리에는 즐비하다. 내 얼굴보다 큰 플라타너스 잎이 떨어질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비현실적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낯선 도시여서인지 역으로 들어가는 아이와의 짧은 포옹에 찔끔 눈물이 났다. 눈이 동그래진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 날, 늦은 아침을 먹고 종묘로 향했다. 나는 이들과의 여행을 좋아한다. 우리는 여행 호흡이 맞다. 빠른 이도 아주 느린 이도 없다. 딱 알맞은 속도로 세상을 본다. 플라타너스 나무 무늬, 은행 나무 잎의 노란 빛깔, 낡은 건물의 외벽을 같이 본다.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붐비는 곳에서 우리만의 속도로 죽은 이들을 위한 공간을 바라봤다. 창경궁을 내려다보며 시간과 공간이 주는 위안을 천천히 새겼다.


가을이 서서히 빛을 거둬들이자 대학로는 다른 빛으로 반짝였다. 노란 은행나무 아래서 시작된 버스킹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도 돌계단에 앉아 모차르트 못지않은 열정을 지닌 그들을 응원했다. 노란 가을이 바람에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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