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움
비 예보는 없었는데 해를 가린 잿빛 구름이 산등성까지 낮게 깔려 있다. ‘하이패스가 정상 처리되었습니다.’라는 경쾌한 알림을 들으며 속도를 올린다. 조수석에서 가방을 껴안고 있는 ㄱ, 뒷자리에 꽃다발과 앉아 있는 ㅅ 그리고 운전대를 잡은 나. 용띠 동갑내기 세 사람이 담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에 있다. 우리는 3년 전에 처음 만나 3년 만에 친구가 되었다. 아침에 가져올 커피를 내리는데 설렜다는 ㄱ, 갑작스런 모임에 늘 완벽한 계획을 짜 들이미는 ㅅ과 친구가 되는 일은 참 더디고 조심스러웠다. 이제는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헤어질 때 다음 만남을 잡으며 아쉬워하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의 늦은 진도를 안타까워하며 적극적으로 만남을 주선해 주던 이를 만나러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가는 내내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시 수업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나보다 먼저 시를 배웠고 같은 시 동아리 회원으로 활동한다. 여전히 첫 강의 날이 또렷이 떠오른다. 시도, 모인 사람들도 하나같이 다 서먹했다. 더운 날이었는데도 긴장감으로 몸이 떨렸다. 강의실은 조용하고 무거웠다. 두 번째 수업 날부터 그만두고 싶었지만 시인 선생님이 가끔 건네는 따듯한 격려에 부응하느라 꾸역꾸역 나갔다. 일주일에 한 편씩 쓰는 시 숙제는 엄두가 안 나 거의 내지 못했다. 그렇게 겨우 과정을 마쳤다. 해방감보다 자괴감에 빠져 있을 때 선생님의 연락을 받았다. ㄱ, ㅅ과 함께 시 공부를 해 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인연은 다시 시작되었다. 동갑내기란 게 무색하게 우리는 서로에게 깍듯했다. 나는 그들이 시만큼 어려웠다. 합평할 때면 가녀린 인상의 ㄱ은 조사 하나까지 조곤조곤 파고들었고 소탈해 보이는 ㅅ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상상력으로 나를 기죽게 했다. 우리는 선생님이 주선한 모임 외에 따로 모이거나 연락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우리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어 앞으로 나아갔으면 했다. 선생님의 노력 덕분인지 공유한 시간 때문인지 아니면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시의 힘인지. 우리는 서서히 그리고 결국 친구가 되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차는 내비게이션의 붉은 선을 따라 시골길에 접어들었다. 한 시간의 거리만큼 가을이 도착해 있었다. 단풍 든 마른 잎이 길을 따라 가지런하게 핀 꽃무릇 위에 떨어진다. 벼가 군데군데 노랗게 익은 논길을 가로질러 마당 한가운데 장독대가 있는 아담한 집 한쪽에 주차했다. 등에 작은 가방을 멘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반긴다.
선생님은 8월 말부터 이곳 창작실에 머물고 있다. 장독에서 은근히 새어 나오는 효소 냄새가 유일한 생명체인 듯 고요하다. 목소리를 한껏 낮춰도 서로를 향한 마음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우리는 응원을 핑계로 선생님을 꾀어냈다. ㅅ이 고른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쓰담길에 자리한 독립 서점에 들렀다. 선생님은 시집 한 권씩을 사 주며 돌려 보라고 했다. 각자 마음에 드는 제목을 골랐다. 관방제림의 놀랄 만큼 우람한 푸조나무 아래서 ㄱ이 내려온 커피를 나눠 마셨다. 커피가 줄어드는 걸, 해가 기우는 걸 아쉬워하면서. 우리는 긴 포옹으로 작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