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
무심코 눈에 담은 것들이 마음에 잔영을 남기면 오래 기억된다. 아홉 살 때 엄마 손을 잡고 거리 행진을 구경하다 눈에 들어온 노란 택시처럼. 봄날 문득 노란빛을 마주치면 그날이 떠오른다. 그런 기억을 그날이 그날 같은 엄마에게, 한숨을 길게 때로는 짧게 토해내는 언니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떠오른 기억으로 위로받을 수 있었으면 했다.
2박 3일의 제주 여행을 계획했다. 엄마와 언니랑 셋이서 여행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아이들과 다른 누군가와 섞여 나들이 가긴 했다. 가기 전부터 엄마와 언니는 간간이 전화로 설렘을 전해왔다. 남편이 예약한 숙소를 중심으로 코스를 짜고 그녀들의 까다로운 식성을 고려해 식당을 정했다. 제주를 여러 번 가긴 했지만 남편 뒤를 따라다니기만 해서 걱정이 되었다. 남편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못 미더운 눈치였다. 남편과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내가 편하자고 가는 여행이 아니니까.
70대 중반에 비행기를 처음 타는 엄마의 심장이 걱정돼 계속 오른편을 힐끔거렸다. 내 예상과는 달리 엄마는 창가에 앉아 구름을 가리키며 언니에게 뭐라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 알아야 했는데, 엄마는 요즘에 태어났더라면 익스트림 스포츠(extreme sports)를 즐기는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걸. 여행 마지막 날,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물으니 우도에서 탄 보트라고 한다. 너무 신났다고. 엄마는 자신은 심장이 약하다며 우황청심환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렌트카를 인계받으며 우리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 다들 배가 고팠다. 첫 끼는 익숙한 남도 한정식을 먹기로 했다. 음식이 깔끔하고 사장님이 친절해서 다시 가 보고 싶은 곳이었다. 여전히 놋그릇에 음식이 정갈하게 나왔다. 엄마와 언니는 여러 가지 반찬을 맛보느라 젓가락이 바빴다. 그녀들 표정을 살피고 젓가락을 들었다. 언니는 밥을 반 공기쯤 비우고 맛있다며 젓가락을 놓았다. 얼굴이 어둡다.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더 먹으라 재촉하지 않았다.
커피를 좋아하는 언니를 위해 한담 해안 근처 카페에 갔다. 평일이어도 어디에나 제주 봄을 보려는 관광객이 많았다. 우리도 그들 틈에 끼여 걷고 사진 찍고 바다를 바라봤다. 작은아이가 따라나선 여행이라 쇠소깍에 카약을 타러 갔다. 아이와 나는 카약, 엄마와 언니는 찰진 설명을 들으며 테우를 탔다. ‘폭삭 속았수다.’를 외치며 뗏목에서 내리는 그녀들 얼굴이 발그레하다. 다행이다.
어딜 가나 풍경이 예뻐서 장소를 고르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식당은 핸드폰이 뜨거워지도록 검색해야 했다. 엄마와 언니는 입이 짧다. 안 먹는 게 많은 데다 후각이 예민하다. 알고 있었지만 한 끼도 아닌 여러 끼를 다 맞추려니 진이 빠졌다. 둘째 날 저녁, 횟집을 예약했다. 가장 고심하며 골랐다. 해산물이 다양하게 나오는 식당이라 비싼 곳이었다. 다들 회를 좋아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횟집에 들어서니 빈자리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한 번 와 본 곳이기도 하고 오기 전에 작은아이와 다시 핸드폰으로 메뉴를 확인했다. 엄마는 맛있다며 잘 먹었다. 언니는 멍게와 소라만 몇 점 먹더니 회가 비리다며 젓가락을 내려놨다. 회가 1/3쯤 남았다. 매운탕을 들고 온 사장이 이렇게 남길 거면 조금만 시키지 그랬냐며 한마디한다. 결국 나도 참지 못하고 볼멘소리를 하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횟집 예약 안 했을 거야.” 언니의 얼굴이 굳는다.
차 안의 공기가 무겁다. 앞유리의 빗방울을 걷어내는 와이퍼만 쳐다보며 숙소에 도착했다. 엄마와 언니를 입구에 내려 주고 주차하러 갔다. 1층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엄마와 언니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만에 입구에 들어선 언니는 화가 잔뜩 나 있다. 길을 잃었던 모양이다. 방에 들어온 우린 서로 날선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씻는다며 욕실로 들어간 엄마가 불러서 샤워기를 틀어 주고 나오니 언니가 소파에서 훌쩍이고 있다. 아, 늘 똑같다. 우린 변한 게 없다. 쉰을 넘어섰는데도.
“나는 언니가 잘 먹었으면 해서 그런 거지.”
“미안해, 나도 잘하고 싶은데...”
언니는 항상 먼저 미안하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싸우면 잘잘못을 따져 보기도 전에 난 이상하게 못된 사람이 됐다. 언니를 안아주었다. 시시비비를 따져 무엇하겠는가? 언니는 야무지지 못한 자신을 탓했고 나는 조금 더 참지 못한 내게 실망했다. 다음날도 아침부터 식당을 검색하느라 휴대폰 배터리가 뚝뚝 떨어졌지만 화나지는 않았다.
비행기가 결항하는 바람에 이틀 더 제주에 머물렀다. 아쉬워하다 받은 뜻밖의 선물에 네 여자가 환호성을 질렀다. 비행기표와 숙소를 예약하느라 진땀을 뺀 남편에게 조금 미안했다. 행복했다고 좋았다고 오래 기억하겠다고 말해 준 그녀들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