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사진은 생략된
아이러니한 사람이다. 마구 던져놓기로 마음 먹고서는 모양이 흐트러지어 보기 싫을까 걱정하고 정돈해서 내놓자니 들이는 품이 적지 않음에 자꾸 미뤄두게 되는. 일단 다시 무언가 쓰기로 하고 한달 여 동안 떠올랐던 것들, 있었던 일들을 나열해 보자.
1. 토스에 대하여
그런데 사진이 없다. 인스타건 사진이건 무언가 기록을 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은 으레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다. 먹는 것, 가본 곳, 때론 들리는 것 까지도 휴대폰과 카메라를 통해 남긴다. 나는 그런 것에 익숙하지가 않다. 원체 귀찮기도 하거니와, 과거에는 내가 내 몸으로 기억하는 것들이 남기는 기록들보다 더 강렬하고 오래 기억된다고 믿었던 것 같은데. 더는 아니다. 나는 이제 토스 어플이 아니면 내가 그날 뭘 먹었고, 어딜 갔고, 누구를 만났고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까마득히 옛날 일이었던 것만 같은 일이 어제 있었던 일인 경우도 있고 너무나 생생한데도 한 달은 훌쩍 넘게 지나버린 일인 경우도 있다. 머리가 나빠진 걸까, 순간에 집중을 못하는 걸까.
계좌 속 수많은 마이너스로 이루어진 내 손으로 쓰지 않은 기록들을 보고 있자면 나는 어지간하면 학교 주변을 벗어나질 않고, 한솥 도시락과 동네 빵집의 밍밍한 빵과 편의점 불량식품을 좋아하고, 주말마다 축구를 하고, 어쩌다 한 번이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으면 새벽이 늦도록 술을 먹기도 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내 손으로 쓴게 아닌 무언가가 나를 드러낸다는게 신기하면서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2. 삶의 방향에 대하여
실무실습을 다녀왔다. 생각했던 대로 그 과정 자체에서 엄청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고 학교를 떠나있다 보니 오히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늘 그렇듯 매조지어지진 않았다. 2주 정도를 낮 기온이 30도가 넘는 날씨 속에 자켓까지 들고 다니는 생활을 하다보니 처음엔 마냥 불편하기만 했던 정장이 어느새 전투복 같은 느낌이 들어 친숙해짐과는 별개로 이 짓을 평생하려면 나름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있어야만 하겠다는 확신은 생겼다. 무엇이 되었건,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내 가치관에 빗대어 스스로에조차 설명하지 못한 채로 동태 눈깔을 하고 만원 지하철에서 부대끼는 삶은 많이 지루하고 힘들테다.
3. 칼부림에 대하여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침에 '부디 아무일이 없었기를' 기원하며 휴대폰을 켠다. 원인이 무얼까 생각하는 일은 몇 시간 정도 하고 그만 두었다. 그리고는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가도 인기척이 느껴지면 전보다 신경이 곤두서는 나를 발견하곤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충동적으로 벌인 행동들이라기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일련의 현상이라 확신한다. 아마 2023년은 많은 이들에게 불안하고 예민했던 한 해로 기억되리라.
소속된 단체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거나, 인간관계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를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재해'로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그런 일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찾아오지만 다행히도 영원히 나를 괴롭히지는 않기에 그렇게 일종의 자기방어를 해온 셈이다.
내가 간과했던 건 자연재해도 여러 종류가 있고, 모든 이에게 동시에 같은 수준으로 찾아오진 않는다는 것. 누군가는 태풍이 걱정에 비해 조용했다 안도하지만, 누군가는 산사태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다른 사람을 겪고 불쾌함을 느끼는 데 그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로부터 공격받아 또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잃어버린 목숨은 시간을 버티면 지나가지도, 회복되지도 않는다. 정말 그걸로 끝.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그 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마저 불안에 잠식시킨다. 불안에서 오는 클릭질을 먹고 사는 몇몇의 못된 사람들이 그것만을 위한 정보를 양산해낸다.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을 선망하는 괴물들이 나타난다. 불안은 더, 더 증폭되기만 한다. 해소되지 않는 불안과 공포는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조차도 사법체계라는 것이 법을 지키며 사는 보통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인지, 법 그 자체를 보호하고자 하는 것인지 회의하게 만든다.
법조윤리 시험에서 나오는 법조인의 윤리란, 누구에게나 자신이 잘못한 만큼만 책임을 지고 벌을 받을 수 있도록, 관련된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거기에 완전히 설득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의문이 일기 시작한다. 99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사람을 벌해서는 안된다는 말, 좋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저 좋은 말이 놓친 99명의 범죄자들을 풀어놓아 생기는 공포를 보통의 사람들에게 감내하라는 뜻일리는 없을텐데, 왜 찝찝함은 사라지질 않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