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지난 토요일로 발리에 도착한 지 일 주일을 맞았다.
아들은 학교에 일 주일을 잘 다녔고, 나는 집을 집답게 만드느라 고전했다.
아들은 학교에 잘 정착한 반면, 나는 집 돌보기에 힘을 많이 소진해서 일을 거의 못했다.
아들은 더운 것 빼곤 이 곳이 무척 좋다고 하고, 나는 바다 빼고는 별로 이 곳이 맘에 들지 않는다.
쓰레기를 태우는 매캐한 연기에 머리가 아프고, 매일 출몰하는 땅바퀴벌레에 기겁을 하며 사투를 벌인다.
화장실 수압이 낮아서 물이 잘 안 내려가서 자주 수동으로 내려야 하는 것도 일이다.
모기도 많은데 이건 불평 안 하기로 했고, 먼지가 많아서 기침이 잦아서 내 폐가 걱정도 된다.
날이 더운 것은 차라리 한국보단 덜 더운 것 같아서 이것도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오십 다 된 어른은 제 아무리 세상을 많이 돌아본 경험이 있어도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게 어렵다.
나이 들면 왜 다들 제 터전을 못 옮기는지 요즘 들어 잘 이해가 가고 있다.
결국 우리 가족은 희한하게도, 아들이 씩씩하게 잘 적응해서 엄마를 격려하고, 엄마는 향수병을 앓으며 고전하고, 아빠는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을 동경하며 외로워하는 모양새가 됐다. 인생 참.
아들은 그간 중국에서 1년, 한국에서 4년 간 국제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중국국제학교는 중국색이 강하고, 한국국제학교는 한국색이 강하다. 나는 한국인들이 많아지면 생겨나는 특유의 경쟁심, 시기, 열등감, 단체의 강요 등이 정말 싫었다. 이를 테면, 아들이 트롬본 연주를 무대에서 선 보이고 돌아오면, 아무리 샘이 나도 "잘 했어", "good job!" 한 마디 정도 하는 것이 사회적 매너일진대, 우리 아들이 다녔던 학교의 아이들은 사회적 교양이 수준 이하여서, "너 무엇 무엇 틀렸던 거 알지? You know you're awkward." 이런 말을 건네서 아이 기분을 상하게 하곤 했다. (일부러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어서 제 인격을 깎아 먹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 곳 학교는 인도네시아색이 강한 학교일 텐데, 그 색깔이란 게 무엇일지 궁금했었다. 뚜껑을 열고보니 부드러운 사고방식을 가진 아이들을 만난 것 같아서 맘이 기쁘다. 학교는 생각보다 공부를 세게 가르치는 편이 아니라서 센 교육을 받고 온 아들은 이 곳에서 공부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는다고 했다. 영어도 수학도 한 번 쯤 배워본 것들이 나오니 학교 가는 게 부담스럽지 않고 좋다.
그리고 수영 수업을 정규 수업, 방과 후 수업 이렇게 두 번이나 배우게 된 것도 긍정적이다. 정기적으로 체육 수업이 이미 2회가 있고, 수영 수업도 2회를 하니 따로 운동을 하지 않아도 제법 운동량이 채워진다. 축구 수업도 1회 신청했으니 완벽하다. 아들은 축구도 하고 수영도 하며 제법 운동소년으로 서울에서 지냈지만, 운동을 거의 하지 않고 학원을 수두룩하게 다니는 서울 아이들 사이에서 운동 좀 하던 것과, 자연 속에서 늘 공 차고 수영 하며 지내는 발리 아이들과 운동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아들이 말하길, 지난 금요일 첫 수영 수업은 시작부터 달랐다고 한다.
"엄마, 애들이 입수부터가 달라." 계단을 이용해서 내려가는 아이가 하나도 없고, 모두 얍 하는 기압 소리와 함께 다이빙으로 입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은 눈치를 보다가 ㅎㅎㅎ 본인도 그냥 선택의 여지 없이 다이빙으로 입수했다고 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시간 내에 레인 오가기를 하는데, 저 쪽에 겨우 도착했다 싶으면 먼저 도착해 했던 애들이, "자 다시 이 쪽으로!" 라는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서 출발해 버렸다고. 그래서 빨리 온 아이들은 잘 쉬고 떠나는데, 늦게 도착한 아이들은 쉴 시간도 없이 다음 레인으로 향하는 '수영장의 빈익빈 부익부'가 펼쳐졌다고 했다. 게다가 이 수영 선생님은 전 국가대표 출신이라고 했다. "I will do my best!" 하고 인사하시길래, 속으로 '안 그러셔도 돼요’ 하고 빌었다. 그러나 아들은 수영 시간에 엄청 달렸고, 결과적으로는 잘 되어서 금요일에 꿀잠을 잤다. 발리의 수영 시간은 그 어떤 나라보다 세게 가르쳤다. 한국의 고급반 수준이었다고나 할까. (접영으로 레인을 가르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하니 정말이다.)
폭풍 같았던 발리에서의 첫 주를 보내고 아들과 나는 주말에 꿀맛 같은 휴식을 가졌다. 금요일에는 새로 오픈했다는 "Living World" 쇼핑몰에 가 보았고, 거기서 "Fun World"란 오락실에 가서 신나게 놀았다. 아이가 어릴 때 상하이 민항구에서 놀러 다니던 아이친하이 쇼핑몰을 꼭 닮아서 친근하게 여겨졌다. 아이는 추억 속 놀이들을 발견하고 깔깔거리며 신나게 놀았다. 코로나 때문에 상하이가 가까운 곳인데도 4년 간 한 번도 가보질 못했고, 우리의 비자는 아쉽게 만료되고 말았다.
토요일에는 집안을 함께 깨끗이 청소하고 집앞에 있는 양식당에 가서 간단하게 밥을 먹었다. 발리에 온 후로 아점은 집밥을 먹고, 저녁은 외식을 하는 편이다. 아이가 학교에 간 날은 아침에 간단하게 밥을 해 주고, 저녁에 집밥을 차려 준다. 인도네시아 식당 음식이 많이 짠 편이라, 가능하면 나가서 먹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매일 요리를 하는 것은 지치는 일이라 - 요리는 쉽지만 설거지 등등이 어렵다. 싱크대 사정도 좋은 편이 아니라서 부엌 청결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 적당히 외식을 병행하면서 살아남아야 한다.
일요일에는 사눌 비치로 나갔다. 차를 20분만 타면 바다가 있다니 이것은 축복 받은 일이다.
발리에선 좋은 건 너무 좋고, 안 좋은 건 많이 안 좋다.
바다는 푸르고 근사하지만, 생각보다 매연이 심하고 곤충들과 매일 혈투를 벌여야 한다.
고단했던 일 주일을 잘 털고 새로이 둘째 주를 시작하기 위해 사눌 관광지에 갔다.
꾸따보다 싼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르논 거주지역에 살다가 사눌로 가니 상대적으로 비싸게 여겨진다.
현지화 과정이 벌써 시작된 모양이다.
발리에는 여러 개의 가격이 존재하고 있어서, 발리 현지인 가격, 자카르타인 가격, 한국인 가격, 영어로 말하는 자들의 가격 등이 있는데, 이 중 영어구사자들이 가장 호구라 할만 하다.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도 과연 이러할까 궁금해진다.
우리는 좋아하는 일식당 아까리에 갔다가 그 앞에 있는 마시모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다.
이 집은 음식도 괜찮지만 젤라토로 굉장히 유명한 곳이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먹는 곳인데, 근 30분은 기다려야 할 거 같아서 그 앞 발마사지 가게로 먼저 갔다. 함께 한 시간씩 발마사지를 하고 아들과 나는 잠깐 곯아 떨어졌다. 가뿐하게 발마사지를 마치고 나오니 젤라토 사는 줄이 좀 줄어 있길래, 신나게 베이비 컵 두 개를 주문했다. 베이비 컵 하나당 두 가지 맛을 고를 수 있어서, 우리는 마르스, 번트 치즈(태운 치즈라니 ㅋㅋㅋ), 로터스, 바나나초코 네 가지를 주문했다.
이것저것 느긋하게 즐기고서 갈 곳은 바다!
우리는 평소엔 호텔에 소유하고 있는 바닷가로 다녔지만, 오늘은 일부러 공용 해변으로 나가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사이 경계를 하얀 구름이 드리우고 있는 멋진 바다였다.
따스한 햇살이 바닷물을 따뜻하게 만들어놓아서 발을 담그기 너무 좋았다.
거기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인도양의 바람이 지난 주 내내 낯선 환경에서 분투했던 내 긴장을 녹여주는 것 같이 여겨졌다. 우리 아들도 학교에 잘 다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긴장했을 텐데 도리어 엄마의 향수병을 위로하며 잘 지내보자고 나를 격려하는 것이 대견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바다는 누구에게나 너그러웠다. 현지 상인들도, 관광객도, 여기 살러 온 외국인들도 누구나 바다에서 근심을 털고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일 주일 동안 열심히 사눌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을 현지인 가족들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바다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화려한 요트도, 고기잡이 배도, 관광객을 태울 스쿠버 다이빙 보트도 바다 위에서는 다 한 조각 배인 것이다. 자연의 미덕이다. 근심걱정을 대양에 녹여주는 커다란 심장 같은 바다.
오늘 두 번째 주가 시작됐다. 이렇게 50여 주가 끝나면 발리에서 약속한 날들이 지나게 된다.
아들과 나는 내년 이맘 때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특히 아들은 얼마나 성장하게 될까? 나는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게 신이 돌보지만, 어른은 스스로가 부단히 노력해야만 조금씩 커 갈 수 있다.
오늘은 그래도 처음으로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해 보았다.
새 오피스에서 업무에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목요일엔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이라 학교가 쉰다. (한국은 화요일이 독립기념일인데 인도네시아는 이틀 후에 공식 독립한 모양이다.)
이번 주도 무탈하게 지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