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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트랄 Dec 01. 2023

발리에 두 번 살다 (9)

사누르의 새벽과 밤

올해 3월에 현지 부임을 준비하기 위해 발리로 출장을 왔었다.


집을 알아보고, 학교를 알아보면서 나는 꽤 초조하고 착잡한 심정을 느꼈다. 차라리 발리살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호기심을 품고 부딪혀보는 재미라도 있을 텐데, 나는 생애 두 번째로 발리에 살러 오는 것이었고 이번에는 지켜야 할 아들도 있었다. 내 일 때문에 함께 오게 되는 내 가족들은 잘 살 수 있을까? 만일 그들이 발리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면, 내 현지 부임은 잘못한 일이 되어 버릴 텐데.


나는 새벽에 잠이 오질 않아서 사누르 바닷가로 걸어 나갔다. 시간은 새벽 5시 30분경, 아직 해가 뜨지 않았을 때였다. 고요한 바닷가를 천천히 걷노라니 생각보다 일찍 기상해서 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호텔 앞마당을 쓸고 있는 직원들, 해변 달리기에 열중하고 있는 외국 관광객들, 새벽부터 만들어서 머리 위에 이고 나온 룸피아를 파는 아낙네들... 나는 그들과 원래부터 알던 사람인 것처럼 아침 인사를 나누면서 바닷가로 섞여 들어가 걸었다.


이들 중 나만큼 다가올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까? 아직 짙고 푸르던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창 하고 주홍빛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사누르의 일출이었다.


말로 들을 땐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데, 보니까 단 일 초만에 그 진가를 알 수 있었다. 15년 전 발리에 오기 전 우리나라에 들렀을 때, 동해 청간정에서 보았던 그런 일출과 견줄만했다. 다른 게 있다면 사누르의 3월 일출은 온화하고 따스한 포옹이라면, 동해의 겨울 일출은 코끝을 에리는 차가운 환영欢迎이랄까.


그 새벽 바다는 내게 와도 좋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에 걸려 있던 흰구름은 마치 천사 날개처럼 보였다. 구름이 날개처럼 펼쳐져서 바닷가에 서 있는 열대목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어떤 길한 신조를 본 것 같은 마음에 나는 좀 더 편하게 발리행을 결정할 수 있었다.


며칠 전 짬이 나던 오후, 사누르 바닷가에 오랜만에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 바닷가 라이브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오래된 팝송에 맞춰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닷바람을 즐기고 파도를 넘으며 놀았다. 고요하고 검푸른 바다가 아들과 깔깔거리며 장난을 쳐주는 것 같았다.


내가 3월에 보았던 그 바다로구나 하고 감상에 잠기려는데, 사진을 찍으며 보니 그때 보았던 그 구름 날개가 또 하늘에 걸려 있다. 지난번엔 붉은 일출과 함께였다면, 밤에는 하얗게 불타듯 빛나는 달님과 함께였다.


달빛을 받아 희고 푸른 날개가 펼쳐진 사누르의 밤. 잘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대로 가도 좋다고. 아프고 힘들 수 있겠지만 그대로 계속 가면 된다고. 지쳐가는 마음을 그렇게 또 바다에서 위로받았다.


발리에서 산다는 것은 별다른 일이 아니다.

삶의 희비애환이 발리라고 비켜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그 어디보다 좋은 것은, 바다가 지켜준다는 것이다.

바다의 약속을 믿어도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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