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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선하 Aug 22. 2021

기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기계나 사람이나 침묵할 뿐이다.

Picture by. Cdd20 / Pixabay

기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기실 진부한 진실임에도 어쩐지, 형형한 눈빛과 나직한 목소리와 은은한 향에 힘을 실어 더욱 의미심장했다.


기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계산하고, 실행하고, 이행하고, 침묵한다. 설계대로 측정하고 입력된 설정값을 산출할 뿐이다. 실로 지속적인 구태의연함은 변죽이 손바닥 뒤집는 사람보다야 되려 깊은 신용을 준다. 다만 증상이 일어난 원인을 파악하고 해석하려면 사람의 언어가 필요할 뿐이다.


기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천재지변은 피할 수 없을 망정 그까짓 뻔한 감정 따위에 굳이 휘둘리지 않는다. 호감을 호감이라 말하지 않고 증오를 증오라 말하지 않으며, 두려움과 무모함을 포장하지 않고, 철부지인 척 어른인 척, 애써 괜찮은 척, 태연한 척 시늉하지 않는다.


기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잃을 이유가 없거니와 얻을 이유도 없다. 속할 이유가 없거니와 벗어날 이유도 없다. 욕심낼 이유가 없거니와 상심할 이유도 없다. 상처 받을 이유가 없거니와 고통에 처절할 이유도 없다. 시선을 주고받을 이유가 없거니와 마음을 나눌 이유도 없다. 다만 시간의 흐름에 따른 노후화는 기계나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돌림노래 마냥 끊임이 없는 심상은 지칠 줄 모르고 연속된다. 보이지 않아도 그 존재가 확고한, 심안과 심이와 심후를 뽑아버릴 수만 있다면 기계 속에 모조리 던져 넣어버리고 싶다. 다만 차갑고 반듯하며 단순한 외양과 달리 그 속은 대단히 뜨겁고 복잡다단함은 기계나 사람이나 다를 바 없다.


기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형형한 눈빛과 나직한 목소리와 은은한 향은 번번이 비수가 되어 기어이 사무친다. 해서 차라리 끄집어낼까도 싶었으나, 파문이 두려운 사람은 비수를 끌어안은 채 기계가 되길 희망한다. 부단히도 부질없이 공허하게 상투적인 언치레를 기계처럼 뇌까리며, 실상은 차고 넘치는 감정을 기어이 꾹꾹 담아 억눌러서 꿋꿋이 침묵을 지킨다.


기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기계나 사람이나 침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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