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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들레 Jul 16. 2021

잘 먹는 존재의 성찰

나의 먹는 자아

나는 농업을 공부하는 사람이고 쌀농사를 지으시는 조부모님의 손녀이고 최소 하루에 한 끼는  '쌀밥' 먹어야 하는 사람이다.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 넓게는 '농업',  넓게는 '먹는 ' 빠질  없는 듯하다. 매일 나는 살아가기 위해 먹고 가끔 먹기 위해서 살아간다.  글을 쓰기 시작한 오늘도 이른 아침 눈을  싱싱한 토마토를 오물오물 씹으며 생각했다. 나는 정말 먹는  없으면 못살아.  순간 무엇인가를 먹거나 먹을 생각을 하거나 먹었던 것들을 떠올리는 나는 지금껏 살면서 무엇을 얼마나 먹었을까. 나와 먹는 것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먹는 것과 나의 관계를 돌아보기로 했다.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 댁에서  먹는 것을 좋아했다. 뜨끈한 숭늉에 멸치볶음 조금 말아서 마늘쫑이랑 같이 먹는 것이 가장 좋았다. 그렇게 밥을 먹으면 정말 뱃속에 끊임없이 음식이 들어갈  있을 것만 같았다. 꼬소하고 짭쪼름하고 달달한, 편안한 식사. 마늘과 마늘쫑이 함께 있는 절임에서 나는 마늘쫑만 골라 먹어서 밥을  먹고 나면 마늘만 왕창 남았던 기억이 아주 생생하다. 그렇게 밥을 먹고 나면  할머니가 잘라주시는 과일을 먹고 유리병에 담겨있던 매실청을 떠서 물을  마셨다. 가끔은 설탕에 절어있는 매실을 쪽쪽 빨아먹기도 했다. 할머니댁에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먹으며 나는 편식 하나 하지 않는, 어른들에게 칭찬받는 어린이로 자랐다. 그렇게 꾸준히 열심히 먹었다.



 열심히 먹는 자아에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어온 것은 열한  무렵이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굿네이버스 다큐멘터리를 여주셨다. 아프리카 개발도상국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나와 같은 나이 대의 친구들인데 나보다도,  동생보다도 왜소했다.  아이들은 물도, 음식도 충분히 먹지 못한 채로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일하러 나가고 있었다. 충격적이었다.  사랑스러운 친구들은  내가 먹는 만큼 먹지 못하고 노는 만큼 놀지 못하는 것인가. 눈물을 약간 훔쳤다. 영상을 보고선 선생님이 나눠 주신 편지지에 편지를 썼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프리카 수단의 어느 친구에게 ‘너의 꿈은 이루어질 거야, 우리 언젠가는  만나자, 응원하고 있을게하는 말들을 전했다.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급식차를 끌고 와서 맛있게 밥을 먹고 남은 음식은 잔반 통에 버렸다. 그때 영상에서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이렇게 음식을 여기서 버리고 있고  순간에 누군가는  음식을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겠구나. 세상에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고통받고 있었구나. 그때의 충격 이후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안에 들어왔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나는 개발도상국, 빈곤, 기아,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먹거나 먹지 못하는 사람에 집중하던 자아에 먹히는 비인간 존재들이 처음 들어온 것은 열여덟이었다. 과제로 '육식의 종말' 읽어야 했다.  책은 너무 두껍고 재미가 없었기에 제대로  지 못했다. 그저 육식이 인간을 포함한 동물에게,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지할 정도로만 읽었다.  수업을 통해서 채식을 시작한 친구가 전교에서    있었다.  친구가 조금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책 “그건 혐오예요 읽었다.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었는데, 마지막 챕터에서 비인간 동물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앞의 다섯 챕터를 매우 공감하면서 읽은 나는 여섯 번째 챕터에서 황윤 감독이 비인간 동물에 대한 학대를 설명하는 것을 보며 약간의 불편함과  충격을 안게 되었다.  충격은 ‘인간-사회적 약자 대한 혐오 구조가 잘못되었다고는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내가 ‘비인간-사회적 약자 대해서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과, ‘인간-사회적 약자 대한 혐오 구조와 ‘비인간-사회적 약자 대한 혐오 구조가 전혀 다르지 않다는  때문이었다. 내가 보는 세상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이었는지, 지금까지 나를 포함한 인간이 비인간 동물에게 가해 온 폭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책을 읽고  달간은 육류를 보면 헛구역질이   같아 육식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기 없는 급식 먹기 오래 유지하기는 어려웠고,  그렇듯 충격과 감정은 조금씩 흐려지기에(그것이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먹는 자아는 자신 안에 많은 존재들을 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19라는 끔찍한 인수공통 감염병을 통해 먹는 자아는 자신, 먹지 못하는 사람, 먹히는 존재 사이의 연결을 감각했다. 먹는 자아가 먹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존재들이 필요했으며  연결에는 너무  문제가 있었다. 모두가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는  연결을 감각하고 ‘자연스럽지 않은 연결 구조에 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자꾸만 질문하기 시작했다.



첫째 과하게 먹는 존재와 먹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먹을  있는 만큼 다른 사람들도 먹을  있는가?, 식량이 공정하게 제공되지 않는  기형적인 식량 분배 구조는 어떻게 해결할  있는가?” 초등학교  처음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꾸만 질문했다.


둘째 먹는 것의 생산과 관련된 인간 존재들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지금 먹는 아보카도 때문에 멕시코에서는 마약 카르텔이 농민들을 공격하고 있다는데, 내가 그것을 감수하고도 이것을 먹는  맞는가? 내가 지금 먹는  연어, 참치를 잡기 위해서 배에 승선한 선원들이 끔찍한 폭력을 당하고 극한의 경우에는 살해당하기도 하는데, 내가 그것을 감수하고 서라도 이것을 먹어야 하는가? 내가 먹는  초콜릿을 만들기 위한 카카오를 재배하기 위해 아이들의 눈물과 땀이 들어있는데 내가 이것을 먹을  있는가?” “가차 없는 이윤추구에 몰두하는 본질적으로 무자비한 자본주의”(J.G.Speth) 체제  생산구조에서 지워지고 착취당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셋째내가 먹는 것과 관련된 비인간 동물들에 대한 질문이다. “돼지, , , , 오리 등의 동물이 오직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사육되는 것이 정당한가? 비인간-동물과 인간의 관계 어때야 하는 것인가? 윤리적인 도살은 가능한 것인가?”


마지막으로는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생태계에 대한 질문이다. “내가 먹는 음식의 가격은 인간이 먹기 위해 파괴하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이 더 많이 더 다양하게 먹기 위해서 토양을 파괴하고 물을 오염시키고 다른 생명들을 죽여도 되는 것인가? 인간을 위해서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 정말 인간의 생존을 위한 것인가?”



먹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하는 먹는 존재는  질문들을 던지며 자신의 먹는 행위에 대해서 자꾸만 질문하고 생각한다. 쓰고 보니 ‘먹는   정체성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다나 시바는 < 세계의 식탁을 차리는 이는 누구인가>에서 “ 세상 모든 것이 FOOD이다. 모든 것이 다른 무언가의 FOOD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니  세상,  생태계를 돌보는 것은 결국 나를 돌보는 것이고, 나를 돌아보는 것은  세상을 돌아보는 것이다. 불편하지만 던져야만 하는 질문들을 던지며 먹는 자아는  열심히 먹거나, 먹을 생각을 하며 입을 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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