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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진 Jan 09. 2023

1월 1일의 일기

한 끼 식사가 주는 힘






를 거듭할수록 실감이 안나는 1월 1일.




작년에 마무리 짓지 못한 바느질을 하며 TV로 새해 카운트 다운을 보고, 새벽에 겨우 잠시 눈을 붙이고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났다.



연말과 새해 첫 바느질



새해맞이 핀봉 정리. 구부러지고 이 나간 핀들을 모두 걸러냈다.




이제 잠이 부족하면 온몸에서 반응이 온다.

무릎이 아프고, 위가 쑤시고, 눈이 따갑다.

'하루를 밤새면 이틀은 죽어'라는 가사가 유난히 와닿는 30대이다.
조금 더 누워있어야지.. 하며 뒤척거리다가 결국 완전히 일어나 버렸다.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코 풀기'였다.


비염약의 부작용으로 코 안이 말라있어서 연고를 발라두었는데 어쩐지 갑갑해서 힘차게 흥! 하고 코를 풀고 나서 멈칫했다.



"아."


잠시 정적.



새해 첫날,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코 풀기라니.



불과 며칠 전, 별 것 아닌 것들에 괜히 의미 부여하지 말자고 생각했었는데 30년 가까이 모든 것에 의미 부여해 온 습관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니, 오히려 좋아.


시원하게 코 풀어서 기운찬 한 해가 될 것 같다.








근래 들어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면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입맛이 없는 걸 넘어서 목구멍에 문이 있다면 아예 '셔터'를 내린 느낌이었다.

영업종료라고 쓰인 가게 앞에 서있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다.


맛깔나게 생긴 요리를 봐도 감흥이 없고, 맛있는 빵냄새를 맡아도, 고소한 커피냄새를 맡아도 무언가를 먹고 싶지 않았다.

전혀 배가 곯지도 않고 딱히 기운이 딸리는 느낌도 없었다. '식사'의 필요도, 즐거움도 잊은 나날들이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지만, 눈앞의 바쁜 일 때문에 바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못했다.

겨우 바쁜 일이 한차례 끝나자 뭐라도 먹어야지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극약처방(?)으로 사이다를 먹었다.

무지무지 달고 톡 쏘는 탄산이 들어있는 음료를 며칠간 먹으니 확실히 입맛이 조금씩 돌았다.

이제 하루에 한 끼 정도는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많이 먹는 것을 떠나서 보통의 1인분 정도는 깔끔히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다.

겉 모양새는 통통하지만 속 빈 강정 같은 건강상태이기 때문에 빨리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를 맞아 점심에는 냉장고 파먹기의 일환으로 아껴둔 소고기를 굽고, 오이로 츠케모노를 만들어 먹었다.


오이를 잘 씻고 껍질을 듬성듬성 깎은 뒤, 0.5cm 정도로 썰어서 보울에 넣어둔다.

한 팩씩 작게 소분되어있는 츠케모노 소스액을 보울에 붓고 뒤적거려 담가두면 끝이다.

스며들기까지의 30분 동안 고기를 굽기로 한다.


얼마 전 기운이 없을 때 먹으려고 보험처럼 사두었던 차돌박이를 잘 달군 프라이팬에 올리자 맛있는 소리가 들린다. 얇은 고기가 익으면서 기름이 나와 지글거리는 소리가 더해졌다. 거의 다 익을 때쯤 소금을 솔솔 뿌리고 불을 꺼서 접시에 담았다.



육향 가득하고 고소한 차돌박이가 운 좋게도 소금간이 알맞게 잘 베어들었고, 오이 츠케모노도 아삭거리고 새콤해서 감칠맛이 돌았다.





저녁에는 시금치를 버터와 소금만으로 강한 불에 빠르게 볶아 고소하고 식감이 좋은 시금치 소테를 만들었다.

해풍을 맞은 겨울 시금치는 싱싱해서 볶아도 아삭하고 달큰한 맛이 살아있었다. 이래서 제철음식을 먹어야 하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리고 한 가지만 먹기 아쉬우니 미소가지구이를 해서 함께 먹었다. 미소와 타래간장, 물을 조금 섞어 만든 짭짤한 소스를 살짝 노릇하게 익은 가지 위에 붓고, 졸여가며 가지를 마저 익힌다.

대충 만드는 야매 미소가지구이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다.



가 선물해 준 복숭아술을 준비해서 식사에 곁들였더니, 기운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얼음 가득한 컵에 복숭아리큐르를 1/3 가량 붓고, 나머지는 사이다로 채웠다.

디저트 수준의 달콤한 술이 되었지만 나는 단 것을 좋아하는 어른이니까 마음껏 달게 먹는다!


오랜만에 조리를 해서 접시를 가득 채운 시금치와 가지는 조금 짰지만, 열심히 식사에 집중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드립 커피를 내려마시며 마무리했다.
핸드드립도 오랜만에 내리는 거라 맛이 조금 아쉬웠지만, 내일은 더 맛있게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하루동안 주방에서 분주하게 요리하고, 열심히 먹는 것에 집중하고,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을 생각하니 무언가 충족된 기분이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함이 차올랐다.










나를 회복하는 방법 몇 가지쯤이야 누구나 뻔히 알고 있 일인데, 물에 잠긴 솜처럼 몸이 축 처져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다.

머릿속으로 고민거리를 해결하는 방법을 수천번 생각하고 시뮬레이션하다가 갑자기 '사소한 움직임'으로 인해  수천번 생각해두었던 해결방안을 실행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말 사소한 것도 상관없다. 청소가 귀찮으면 책상만 정리한다던지, 하다못해 돌돌이로 머리카락만 찍어낸다던지, 재활용 쓰레기만 정리해 둔다던지.


일단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는 톱니바퀴가 째깍거리며 맞물려 돌아가듯 연쇄적으로 더욱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작은 움직임이 여러 번이면 큰 움직임이 되어서 회복하는 힘이 된다.





1월 1일의 교훈은 맛있는 식사로부터!




마스터 술 끊기지 않게 주세요!






마르쉐에 가면 무엇이든 몽땅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근자감이 생긴다. 구경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 !


22.11.26 마르쉐 성수


정말 맛있었던 레드키위와 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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