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어메이징 그레이스> 리뷰
무언가를 '진짜'로 만드는 요소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무언가의 진실성을 판단하고 또 신뢰하는가. '진짜'란 정말 '가짜'의 정 반대쪽에 위치한 절대적인 개념일까? 사실 진짜와 가짜는 흑백이 아닌, 무한한 스펙트럼의 개념이 아닐까? 조금 덜 가짜인 것과 조금 더 진짜인 것 사이에는 그저 아주 미세한 크기의 공백만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가짜'를 '진실성이 결여된 것'으로 상정하지만, 그 진실의 정의는 누구도 확언하지 못한다. 가짜가 가짜인 까닭을 찾기는 쉬울지 모르지만, 가짜가 '진짜가 아닌' 까닭을 들기란 상당히 어려운 이유이다. 진실에 대한 확신 없이 가짜를 찾는다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삶을 스쳐 지나는 많은 사건과 사람, 현상들을 가짜로 분류하고 자신의 좁은 세계에서 몰아내 마음의 평화를 얻곤 한다.
이것은 필자의 의견이 아니다. 이 알 수 없는 가정을 따발총처럼 뱉어내며 우리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여성이 있다. 그의 이름은 그레이스 최. 아니, 이조차 진짜 이름이 아닐지 모른다.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만이 진실인 그는 다만 지켜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다. 연극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소개한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재벌 사모님들을 상대로 한 대규모 사기 혐의로 적발된 '그레이스 최'가 검찰에 송치된 후부터 시작된다. 검사는 탐문 전, 간단한 신원 확인을 위해 '당신의 이름은 그레이스 최입니까?'라고 묻지만,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죄를 심문하는 게 아니라 단지 절차 상 필요하기 때문에 이름을 묻는 것 뿐이라는 검사의 말에도 '그레이스 최'라 불려온 여자는 침묵한다. 마치 그건 나를 충분히 대변할 수 없는 명칭이라는 듯.
답답해진 검사는 계속해서 그레이스를 추궁한다. 그의 목표는 간단하다. 실적 올리기. 빽 없고 힘 없는 스스로를 구원하려면 이번 사건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검사는 그레이스가 판매한 박흥용 화백의 <소녀>라는 그림이, 91년 작이라는 그 그림이 값싼 모작임을 역설하며 박흥용이 실제로 90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레이스 최는 그의 발판이 되기를 멋지게 거부한다.
그레이슨느 가짜는 가짜를 증명할 필요가 없음을, 오히려 그 자체로 완벽함을 강조한다. 검사가 들먹이는 외국 기관의 검사 결과니 신원 조회 결과니 하는 것들 역시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이후 박흥용의 오랜 친우였던 무명 화가의 딸이 바로 자신이라는 고백을 내놓은 그레이스는 일부 '진실'이 다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가 되지 못한 것인지 질문한다. 아버지의 모작이 좋은 평가를 받자 입을 다물었던 박흥용, 모작을 그리며 죽어간 아버지 등은 오로지 그레이스만 알고 있는, 아니, 알고 있다고 믿는 '진짜'였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레이스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고자 하기도 한다. 그레이스를 '이 시대의 잔다르크'라고 칭송하며, 낡은 권위에 대적하는 그를 돕겠다고 말하는 변호사 말이다. 그러나 그는 초반 두 번의 승리 이후에는 법정공방을 피하고 오로지 합의로만 명성을 올려온 회피적인 변호사였다. 자연히 그레이스 최의 구원자가 되어줄 수 없었고, 그레이스를 프레임에 욱여 넣기에만 바빴던 변호사 역시 이후에는 그레이스의 무지와 오만함을 비난하며 돌아선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취조실이라는 제한된 공간, 3명이라는 제한된 인물, 간단한 무대 장치 안에도 거대한 함의를 성공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인물 구도는 몰입도를 높인다. 그레이스 최의 가짜와 진짜를 넘나드는 황홀한 연극은 극중 인물뿐 아니라 관객들을 쥐고 흔든다. 모두가 조금은 거짓된 인생을 살아가지 않느냐는 듯 뻔뻔하고 우아하게 우리의 상식 위를 거니는 그레이스는, 연극계에서 목도하기 어려웠던 독특한 인물상이다. 변호사 역시 그러하다. 마치 돈키호테의 현대판을 보는 것 같은 그로 인해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밀도 높은 우화의 형태를 띄기도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있었다. 조사를 받던 그레이스가 전형적인 팜프파탈 캐릭터로서 두 남성에게 소비되는 모습은 보기 편치 않았다. 검사의 부도덕한 면을 비추기 위해 반드시 그레이스를 성적으로 탐하려는 장면을 선택해야 했을지 의문이 들었다. 또한 두 남성 인물이 연신 탁자를 때리며 굉음을 내고 난동을 부릴 때마다 불편한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레이스를 물리적으로 위협하는 ―목을 조른다든가, 걷어 찬다든가― 적나라한 장면 등 역시 여성 관객으로서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낡은 연출이라 느낀다.
또한 두 남성이 그레이스를 각각 창녀와 성녀의 이미지로 이분화시키고 있다는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이 두 캐릭터의 편협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구도가 연극의 큰 구조를 이루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느꼈다. 그레이스 역시 해당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탈피해 본인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보다 이 분류법의 인력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결국 그레이스는 거대한 프레임 안에 포착되고, 그것을 양쪽에서 관음하는 두 남성으로 끝이 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상징적 존재로서 '관음 당하는 여성'과 주체적 존재로서 '관음하는 남성'의 구도가 여전히 반복되는 기분이 응어리처럼 남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앞세운 가짜와 진짜에 관한 공방, 그레이스라는 상징적 인물이 뜻하는 바는 분명 큰 의미를 지닌다. 팔색조의 매력을 지닌 캐릭터와 밀도 높은 서사, 적당한 장르성이 주는 흥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꽉꽉 채운 은유는 티켓값이 아깝지 않을 만큼 황홀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