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덕후다!
어릴 때는 이 말을 참 싫어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내 인생 첫 아이돌 그룹인 동방신기를 좋아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듣게 된 단어였다. 요즘에는 잘 쓰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연예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빠순이'라고들 불렀다. 사전을 찾아보니 '오빠 순이'의 줄임말로 '오빠에 빠진 어린 여자아이'라는 뜻이란다. 대중 스타들의 열성적인 팬들을 비하해 부르는 말이라 어감이 나쁜 것은 물론이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낯이 뜨거워져 사람들 앞에 나를 내세우지 못하게 만드는 못된 단어였다. 어디 가서 "나 빠순이야!"라고 먼저 소리치는 사람도 상당히 드물다.
그 외에도 오타쿠(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 덕후 등의 표현에는 꼭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있었다. 그래서 때론 농담을 섞어 나를 '빠순이', '덕후' 같은 단어들로 지칭하는 사람들 앞에서 유독 예민하게 날을 세웠던 것 같다. 공식 팬클럽 이름을 전 국민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 카시오페아, 아미라고 불러주지는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누군가를 향한 한 사람의 마음을 저급한 것으로 여기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표현들을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사람들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럼에도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좋아했다. 처음엔 아이돌을, 그러다 어느 순간 인디밴드를, 또 잠시 고개를 돌려 스포츠 스타들을, 그리고 결국엔 뮤지컬 배우들을. 그다음 정착지는 또 어디일까. 참 이렇게 다이내믹하게 장르를 넘나들기도 쉽지 않다. 하여튼 흥미로운 일에는 다짜고짜 달려들고 보는 나는 '덕질'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나 싶다. 이러다 온 세상을 다 사랑하게 될까 봐 걱정스럽다. 하지만 매사에 감흥 없이 무딘 사람보다는 이렇게 사는 편이 확실히 재미있다. 결국 '덕후'라는 단어와 동고동락해야 하는 삶이다. 물론 요즘은 덕구라거나 처돌이 처럼 애틋한 느낌을 주는 대체 용어들이 더 흔히 쓰인다.
어느 날 친구와의 대화중에 '덕후'라는 단어가 나왔다. 그 역시 어느 아이돌 그룹의 팬이다. 그날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일찌감치 까먹어버렸지만, 그럼에도 선명히 기억나는 그의 말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덕후야.
아이돌을 좋아하든 카페를 좋아하든 게임을 좋아하든
다들 좋아하는 게 하나씩은 있잖아
무릎을 탁 쳤다. 그랬다. 꼭 유명인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덕후라고 규정할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누구나 하나쯤은 취미가 있고 즐겨 찾는 공간이 있고, 관심을 갖는 존재가 있으니까. 하물며 활동적이지 않아서 집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책, 드라마, 영화, 커피 등등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이 수없이 많다. 그저 대상만 다를 뿐이지 그것을 대하는 마음은 모두 같기에 내가 해온 '덕질'과도 조금씩 닮아있는 듯했다. 친구 덕분에 나는 30여 년 만에 '덕후'라는 단어를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주위를 돌아보니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특히 내가 닮고 싶고, 부러워하던 작가들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덕후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배우 하정우는 걷기를, 뮤지션 오지은은 여행을, 이승희 마케터는 기록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글을 썼다. 가장 최근에는 최애 카피라이터인 김민철 작가의 신간을 냅다 사버렸는데, 이 책도 그가 좋아하는 치즈에 관한 내용이다.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라는 제목의 이 책은 무려 191페이지다. 계속 치즈, 치즈, 또 치즈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나는 자신의 '덕질' 스토리를 적어놓은 그들의 책을 읽을 때 행복하다.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억지로'가 아니라 '좋아서' 하는 일은 어느샌가 개인의 역사가 되어 있곤 한다.
'시간을 내서' 하지 않아도 그것에 자연스럽게 쌓인 시간은
어느새 책 한 권 분량이 되고도 넘친다.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마음도 없이, 이걸 이용해 뭔가를 하겠다는 야망도 없이,
그냥 좋은 것, 그저 끌리는 것.
<치맛치뿐>의 프롤로그에도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나는 아직 김민철 작가처럼 나의 생각과 감상들을 근사한 문장들로 바꾸지 못한다. 그럼에도 내가 좋아했던 것, 좋아하는 것, 좋아하게 될 것들과의 시간은 언젠가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까. 그날을 위해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말하고 즐기는 모든 것들을 세심히 적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의 글은 내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시데레우스>에서 제일 사랑하는 대사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당신의 눈앞에 항상 길이 있기를
바람은 언제나 당신을 스쳐가고
따뜻한 햇살만 당신을 감싸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