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는 이미 시작되었나요?
교환학기 중에 짧게 주말여행으로 런던을 다녀왔다. 목표 중 하나는 '위대한 개츠비' 연극을 보고 오는 것이었다. 관객 참여극이라, 무대와 관객석이 구분되어있지 않고 배우들과 직접 호흡하면서 관람할 수 있다. 너무 기대됐다. 한 번도 이런 공연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공연을 예매하면 메일이 날아오는데 그게 개츠비 하우스 파티 초대장처럼 온다. 그리고 1920년대 의상을 입고 오면 더 즐길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전해온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 없다고도 했고, 학기 중에 그런 의상 구하기도 힘들뿐더러 백팩 하나 매고 가는 1박 2일 여행이어서 우리는 의상까지는 준비 못했다.
그리고 당일에 엉뚱한 곳에 가게 된다. 주소를 잘못 알아서 공연에 늦게 된 것이다. 헐레벌떡 공연장 건물 앞에 도착해서도 사실 헷갈렸다. 문도 닫혀있었고 전형적인 공연장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이미 길을 잃은 뒤라 자신감이 떨어져서 고민하다가 공연장 문을 두드렸는데 응답이 없었다. 이렇게 돈을 날리는 건가 낙담하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두 세명이 나왔다. 그들은 문 앞에 서 있는 우리를 보면서 깜짝 놀라며 말을 걸었다.
헤이, 어서 와. 초대받은 친구들이니?
개츠비 씨가 너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나는 이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워.. 하면서 당황했다가 맞다고 했다. 혼동해서 다른 곳으로 갔다 와서 늦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와 대화하면서도 철저히 개츠비 하우스의 일원처럼 굴었다.
갑자기 이렇게 개츠비 집인 것처럼 군다고?
그들이 문을 열었을 때, 그들도 우리를 발견하고 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했다. 내 추측은 이렇다.
1. 그들이 잠시 쉬러 밖으로 나왔다가 우리를 발견했다. 그러다가 바로 연극 on을 하고 그때부터 상황극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재킷 없이 셔츠차림이었는데, 왠지 손님들을 한 차례 받고 쉬는 타임이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쉬러 잠시 나왔다가 우리를 봤던 게 아닐까? 기가 막힌 순발력인 것이다.
2. 이게 애초에 지연 관객 매뉴얼이다. 우리가 문을 두드리자마자 매뉴얼대로 손님을 맞은 것이다.
둘 중 뭐가 진실이어도 그들이 프로인 것은 확실하다. 관객 참여극이기에 지연 관객 입장이 안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긴장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개츠비 씨가 너네를 기다리고 있다며, 우리를 위층의 개츠비의 파티장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안내사항도 같이 일러주었다. 끝까지 그들은 철저히 그 시대의, 개츠비 하우스의, 직원이었다.
그때부터 와, 이거 장난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콘셉트에 진심이라면, 과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이었던 것은 공연이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원작을 알고 갔기에, 스토리 흐름이 극초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공연 안내 사항을 말하느라, 공연 시작은 한지 얼마 안 된 것이리라. 한편엔 술을 마실 수 있는 바도 있고, 실제로 관객들이 잔을 들고 다니며 마시고 있었다. 공연 무대, 홀, 계단, 테이블 등 정말 개츠비 하우스의 파티장에 온 것 같았다. 그리고 1920년대 의상을 입고 오라고 한 이유가 느껴졌다. 물론 우리처럼 현대복을 입고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누가 배우이고 누가 관객이며, 또 누가 진행요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손님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대사를 치면서 배우들과 연기를 할 땐 깜짝 놀랐다.
또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노래에 맞춰서 중앙홀에서 배우와 관객이 뒤섞여서 함께 춤을 춘다. 처음엔 당황할 정도였다. 하지만 갈수록 즐거워졌다. 나 또한 극의 인물이 되어 있다는 기분도 들었다. 배우와 같은 무대를 밟고 같은 노래에 흥겹게 춤을 추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1. 극에 더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인가?
흠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우선, 관객들이 배우의 연기에 방해되는 위치가 아니면 세트장 곳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배우들에게만 눈이 가기 어렵다. 이건 원형무대의 단점과도 비슷하다. 관객이 종종 내 눈길을 빼앗는다. 또 관객석이 따로 없기 때문에 서서 보거나 적당히 앉아서 봐야 하는데 그게 극이 꽤 길기 때문에 관객이 편하게 관람하기에는 곤란하다.
또 무대 세트도 너무 적나라하게 보인다. 이건 중후반부까지는 좋았는데, 엔딩의 개츠비 죽음 씬에서 문제가 되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보다 보니 오히려 진짜 같지 않음이 잘 보여서 집중하기 힘들었다.
관객과 배우의 거리가 좁아진다는 건 고려할 점이 많은 것 같다.
2. 모두가 같은 극을 보지 못한다.
이건 장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만 본다고 가정하면 이건 명확히 단점이다. 파티장 메인홀에서 대부분의 서사가 진행되지만, 종종 사람들을 나누어서 다른 공간에 데려간다. 몇 명만 데려갈 때도 있고 집단으로 데려갈 때도 있다. 하지만 선택받는 건 완전 복불복이다. 어떤 사람은 한 번도 다른 공간에 가지 못할 수도 있다. 사실 그래도 극은 이해가 간다. 그 순간에도 메인홀에서는 극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나 따라가냐, 어디에 따라가냐에 따라서 극을 더 풍성하게 즐기느냐가 결정된다. 예를 들어서, 따로 들어간 스몰 룸에서 펼쳐지는 내용은 인물의 내면이나 복잡한 마음을 발화하는 것에 그칠 수도 있지만, 인물들의 비밀을 알 수도 있다. 그 공간이 어떤 곳인지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오로지 선택받은 사람들만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람 마음이 마음인지라 스몰 룸에 들어가고 싶게 된다. 그러면 진행요원이 어디서 사람들을 따로 데려갈까, 언제 또 데려가려나 하면서 눈치를 보게 되고 그게 극을 집중하는데 방해가 된다. 못 따라가면 솔직히 아쉽다.
메인홀에 있으면 다른 방에서 일어나는 장면은 알 수 없고 공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후반부에 딱 한 번 메인홀에서 스몰 룸을 볼 수 있게 된다. 갑자기 스몰 룸과 메인홀을 구분 지었던 장치가 사라지면서 한 스몰 룸이 통째로 열린다. 그리고 그 장면이 극적으로 연출된다. 그때 나는 메인 홀에 있었는데, 갑자기 공간이 확 트이면서 스몰 룸에 있던 배우들과 관객들이랑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엔 모두 메인홀에서 극을 보게 된다. 신선했다. 스몰 룸과 메인홀로 세트를 나누니 이런 극적인 연출이 가능하다. 그 장면이 우리에게 들킨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우리가 중요한 정보를 맞닥뜨리게 된 것 같기도 하고.
장단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극은 단연 추천한다. 우선 전통적은 구조의 연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우를 정말 코앞에서 볼 수도 있고, 배우가 내게 말을 걸기도 하고, 배우와 함께 춤추는 극이 흔하진 않다. 그리고 메인 홀에 있는 테이블이나 계단에서 앉아서 볼 수도 있다. 보통 무대 장치는 배우들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 극에선 관객이 그 세트에 직접 앉아서 관람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관극을 해보고 싶은 사람들에겐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함께 관람하는 걸 추천한다. 스몰 룸으로 들어가는 기회가 꽤 있기 때문에 친구들과 보면 각자가 들어간 방에서 어떤 방이었는지, 인물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공유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나고 각자가 어떤 다른 장면들을 보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면서 집에 돌아가면 좋지 않을까.
또 개인적인 궁금증은 이 극은 도대체 어떻게 연습했을까?이다. 시점도 여러 개가 흐르고, 메인홀과 스몰 룸에서 일어나는 일이 시간선은 같으면서 다른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스몰 룸에 들어간 사람들도 메인홀에 다시 모이게 되는데, 그러면 타이밍이나 큐 문제도 복잡해질 것 같다. 물론 무슨 초단위로 그게 정해져 있진 않겠지만, 관객이 오고 가는 타이밍도 생각해서 극을 진행시키는 건 쉬운 문제는 아니니까. 또 진행요원과 배우들의 능력이 정말 중요할 것 같다. 진행요원이 극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때때로 스몰 룸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배우인지 관객인지 모르게 조용히 극에 묻어 있는다. 배우들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연기 외에도 집중력이나 센스가 같은 것이 필요하다. 더불어 진행 능력도 말이다. 웬만한 베테랑이 아니고서야 극을 주도하기 힘들 테다.
이 극은 연습할 때 관객의 유무가 중요할 것 같은데, 관객을 두고 연습을 할까? 관객이 이 스토리의 엑스트라이자, 감초이자, 또 관객이니까 말이다. 스태프들을 관객으로 가정하고 연습을 하려나. 제작기가 매우 궁금한 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