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의 위성 Aug 21. 2022

방랑자가 된다는 것은 마음을 쓰는 일

몰랐던 나에 대해 알아가기 : 커피, 빵, 단순함

여행을 가기 전에 스스로를 어떻게 위치시켰더라?

여행 전, 내 상상 속의 나는 유럽을 누비는 진취적인 여행자였다. 그러나 여행자는 곧 방랑자다. 특히나 한 달가량의 여행 스케줄을 가진 유럽 여행자는 도착한 곳을 늘 떠나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을 여행의 첫 도시, 파리를 떠날 때 깨달았다. 내가 펼친 만큼 다시 정리해서 이곳을 떠나야 하는구나. 하지만 그게 그렇게 나를 지치게 만들 줄은 몰랐다.


캐리어 하나에 나의 모든 살림을 담고 이리저리 쏘다니는 것은 언제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일이었다. 샤워를 하기 위해서는 늘 내 세면도구 파우치를 꺼내서 들고 가야 했고, 욕실에 그것을 두고 올 수도 없었다. 옷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입을 옷만 꺼내 두고, 나머지는 정리해서 캐리어 안에 넣어두었다. 호스텔 침대에 딸린 작은 수납공간에 올려놓는 스킨케어 파우치 정도가 다였다. 내가 캐리어에서 내 짐을 펼쳐놓는 만큼 나는 떠날 때 그 짐을 다시 정리해야 했다. 도시를 떠날 때마다 압축팩과의 난리부르스를 매번 겪어야 했다. 어떤 것을 얼마큼 꺼낼지 갈수록 계산이 빨라졌다. 흔적을 내려놓기 까다로운 삶이었다. 내 궤적을 그리는 만큼 내가 그것을 다시 지워야 했으니까.

호스텔 침대에 붙어있는 수납 공간. 작고 소중해.

처음엔 단순히 체력 문제인 줄 알았다. 매일 만보 이상씩을 걷고, 관광하고, 사람들을 만나니 말이다. 또 국가와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캐리어와 함께여서 그런 줄 알았다. 유럽의 돌바닥은 정말.. 내 캐리어 바퀴가 부서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특히 피렌체의 돌바닥.. 잊지 않겠다. 그런데 여행의 중반 지점이었던 베니스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아 이거 마음을 쓰는 일이구나.


며칠 뒤면 떠날 도시에서 짐을 푸르는 일이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내 마음을 많이 쓰는 일이라는 걸. 어디든 정을 붙이면 떠나야 할 곳이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도시도, 뜻밖의 난관을 마주치는 도시도 떠나보낼 방랑자 신세. 얼마 후엔 네모난 캐리어에 모두 쑤셔 넣어야 할 짐을 지금 풀러야 하는 게 먹먹했다.


그러니까, 정착 없는 삶이 계속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때때로 마음 아프게 했다. 나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고, 그곳에 정을 붙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계적인 가수들이 해외 투어를 돌면서, 콘서트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면 너무나 허무하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을까? 내 공간이 아닌 곳에서, 곧 떠날 공간에서, 나를 누이고 쉼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마음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유랑하는 자의 마음은 전혀 홀가분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닿을 내리고 싶었다. 나에겐 역마살이 전혀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다. 역시, 겪어보지 않으면 알지 못할 일들이다.


친구들이 종종 물었다. 한국 오고 싶어?

그럼 나는 대답했다. 한국이 아니라 영국이 가고 싶어. 나는 한 달가량의 유럽 여행 후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는 일정이었다. 그러니까 고국도 고국이지만 정착할 곳이 절실했다.

내 옷도 옷장에 걸어두고, 욕실용품도 욕실에 내 입맛에 맞게 배치해두고, 나의 노트북과 여러 소지품들을 책상에 늘여놓고 싶었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는 것을 처음으로 배웠다.


그런데 심신이 지친 상태가 되니,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알맹이를 알게 되었다.


1. 커피를 무진장 좋아한다.

원래도 커피를 좋아했는데, 유럽 여행을 하면서 카페인 중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한 잔은 꼭 마셔야 여행이 가능했다. 아침에 한 잔 들고 출발하는 것도 좋았고, 중간에 커피를 마시면서 한 숨 돌리는 것도 낭만적이었다. 이국적인 풍경에 시원한 커피 한 잔이면 나는 어디서든 재충전이 되었다.


2. 빵은 질리지 않는다. 특히 달달한 빵은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날이 갈수록 한식을 찾았지만, 또 빵이 질리지는 않았다. 맛있는 빵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은근히 아무 정보 없이 들어가는 동네 베이커리나 카페가 엄청난 맛집이었다. 바쟉바쟉한 페스츄리에 풍미 가득한 크림. 거기에 쌉싸름한 커피 한 잔. 행복도를 올리기에 안성맞춤이다.

우연히 들어간 카페가 맛있을 때, 보물을 발견한 것 같다

3. 나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그러니까 커피와 빵만으로 나는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이다. 금방 우울감을 털어버리고 다시 시작할 힘을 얻는다. 포르투의 어느 날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여행 막바지였는데, 그날도 며칠 뒤면 다시 꽁꽁 싸야 할 짐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졌다. 거의 울랑 말랑한 기분으로 짐을 풀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어느 순간 짐을 정리하는 것에 집중해버려 정리가 끝났을 땐, 어느새 울적한 기분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에그타르트를 하나 사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단순하게도.


에그타르트야 너를 정말 사랑해


그래서 여행 중에 너무 지치거나 약간의 현타가 오면 카페인과 당을 샀다. 하루 종일 숙소 안에 있거나, 로비나 공용공간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면서 피로를 풀었다. 아니면 간단하게 그날은 숙소 주변에 카페만 들르기도 했다. 커피 하나에 달달한 빵을 시켜놓고 그 순간만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면 괜찮아졌다.


낯선 공간에서 오히려 나를 알아갔다. 익숙한 것이 사라지니, 나를 편안하게 만들고 나를 안정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가려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방랑자로 살아가는 건 마음을 쓰는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방랑하기에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어떻게 마음을 다독이고 다스려야 하는지 배우게 되었다. 정말로, 유랑은 나를 시시각각으로 알아가게 만들었다. 그래서 다들 터전을 떠나, 전혀 모르는 곳으로 떠나는 걸까?







작가의 이전글 개츠비 하우스에 지각하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