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국 대학에서 교환학기를 보내면서 주로 '영화' 수업을 수강했다.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양을 제외하고는 영화 수업으로 시간표를 짰다. 그런데 수업을 듣다 보니 한국 수업과의 차이점이 명확하게 보였다. 바로 구조적인 차이점이었다.
수업은 크게 screening과 class로 나뉘었다.
screening은 말 그대로 영화를 보는 시간이었다. 주차별로 정해진 주제에 맞는 영화를 보았다. 월요일에 screening이 있다면 수요일에는 class가 있었다. class는 월요일에 본 영화를 토대로 이론과 감독 등에 대해서 배웠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대학(한국)에서 수업을 들을 때, 영화는 각자 보고 오거나 혹은 다 같이 보아도 전체적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물론, 교수님들이 가끔 물어보기는 하셨다. 오늘 수업의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러면 보통 다들 대답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가끔씩 다른 학우들이 발언을 하긴 했지만 그래 봐야 한두 명이었다. 학생들의 의견을 알고 싶으면 과제가 있어야 했다. 발표 과제라던지 리포트라던지. 그러면 교수님들도 학생들의 생각과 감상을 풍족히 볼 수 있었다. 나 역시도 제출하는 과제에는 여과 없이 내 감상을 펼쳤던 것 같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 앞에서 의견을 말하는 건 잘 하지 않았다. 게다가 거긴 외국이었다. 영국 대학에서 영어로? 어우,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class는 무조건 말을 해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돌아가면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고,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고 주제가 다른 데로 튀기도 했지만 모두 말을 했다. 교수님은 길을 정돈하거나 학생들의 의문에 대답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틀렸다거나 생각을 얕보거나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순서가 오기만을 덜덜 떨며 기다리며 노트에 말을 할 것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최대한 안 떨리는 척 발언했었다.
첫 주 수업이 끝나고 나오면서, 이거 기 엄청 빨리는데.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과 영어로 말하는 학우들의 의견을 듣는 데에도 모국어에 비해 품이 드는데 매주 말까지 해야 했다. 물론 그러려고 교환학생을 온 거긴 하지만...
class는 크게 두 파트론 나뉘어서 진행되었다. 전반부에 잠깐 교수님이 오늘 이야기해 볼 내용에 대해서 전반적인 강의를 하셨고, 그 뒤에는 학우들과 토의하게 만들었다. 어떤 수업은 돌아가면서 이야기했고, 또 다른 수업은 그 주변 아이들끼리 모여서 팀대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어쨌거나 무조건 영어로 말은 해야 했다.
특히 영화 개론 같은 기초적인 수업에서는 수업을 screening + class + lecture로 진행되었다. 한 과목이 일주일에 3번의 수업이 있는 것이다. 대신 lecture는 screening 앞에 붙여서 수업을 했다. lecture 동안 배워야 할 강의 내용을 듣고, 그 뒤에는 screening을 통해 영화를 본다. 그리고 며칠 뒤에, class에서 궁금했던 점을 질문하거나 같이 의견을 나누면서 공부한다. 인풋과 아웃풋을 나누어서 학생들에게 배분한 것이다. 인풋이 들어가면, 학생들은 class에서 반드시 아웃풋을 내야 했다. 그것의 완성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야기하는 것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영화에서 내가 못 본 부분을 본 학우가 반드시 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절로 집중하게 된다.
또 영화 개론 수업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분반 시스템이었다. lecture과 screening는 아주 큰 강의실에서 진행되었다. 계단식으로 의자가 깔린 강의실은 마치 대형 영화관 같았다. 그러니까 같은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수가 엄청 많았다. 하지만 class에 들어가 보면 십여 명 정도였다. 그 많은 학생들을 다 쪼개서 소그룹으로 분반하여 class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학생에게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고, 교수님도 모두에게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다. 분반에 따라 교수님들도 각 반에 배정되었을 테다. 그러니까 한 수업에 들어가는 반, 인력, 시간이 엄청났다. 그러니 나는 당연히 구조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시스템. 시스템이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 속에서 나는 말할 기회가 많아졌다. 비는 시간 혹은 수업 중간에 틈을 만들어 발언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아예 통째로 시간을 만들고, 교수님을 각 분반에 배정하고, 분방 당 학생수는 10여 명 남짓으로 소수로 정한다. 그런 환경에서는 아 이거 말하라고 만든 수업이구나를 깨달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두 주만 지나면 적응하게 된다. 물론, 내 차례 오기 전까지 노트에 영어를 벅벅 써가면서 말할 걸 정리하는 건 꽤 오랫동안 그랬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다양한 학생들의 시각을 들어볼 수 있었고, 거기에 대한 교수님의 자세한 피드백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 전달에 그치지 않고 더 확장된 배움이 가능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영화 수업을 듣길 잘했던 게, 이미 한국에서 배운 개념들이 많았으며 애초에 영화 용어가 영어라 한국에서도 그대로 배웠었다. 그래서 처음에 크게 어렵지 않게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첫 수업에서 속으로 '어휴 어휴 다행이다'를 얼마나 외쳐댔는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바라보는 시야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세계 영화라는 다양한 국가의 영화와 영화산업에 대해서 배우는 수업이 있었는데 거기서 예상 밖의 영화들을 만나기도 했다. 세계 영화 수업은 screening이 오전 9시라서 보통 '으어어'거리며 커피 한 잔을 사서 겨우 도착하곤 했었다. 그날도 그랬다. 커피 마시면서 겨우 잠을 깨 보려고 했다. 그날은 Comedy가 주제였다. 그래서 '재밌는 영화 보겠다, 시간 잘 가겠네' 하고 막연히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데 보았던 영화는 Toni Erdmann (Maren Ade, Germany/Austria/Switzerland/Romania, 2016)였다. 처음에는 내가 이해를 못 하나 싶었는데 점점 '이게.. 코미디..?'라는 감상이 들었다. 이 코드를 코미디로 받아 들어야 하나? 특히 후반부가 당황스러워서 생각이 아주 많아진 채로 강의실에서 나왔다.
또 발리우드가 주제였을 때는 Om Shanti Om (Farah Khan, India, 2013)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 스크리닝일 때, 학생들이 유달리 많이 안 와서 소수 인원으로 감상했는데 다 끝나고 나서 우리는 서로 바라보면서 'ㅋㅋㅋㅋ왓?ㅋㅋㅋ'했던 표정을 잊지 못한다. 급전개나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래나 춤 시퀀스는 너무 신난다. 이 이후로 특정 장면이 내 웃음 버튼이 되어서 우울할 때 그 시퀀스를 보기도 한다. 골 때리는 전개들이 있지만 그게 매력으로 보일 만큼 재미있다. 다들 이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 궁금했고, 교수님에게도 궁금한 것 천지였다.
세계 영화 수업에서 만난 작품들은 대부분 이렇게 잘 접해보지 못했던 영화들이어서 screening이 끝나면 '이 영화 대체 뭐지?' 하며 교수님의 수업이 기다려졌다. 나만 이 영화 이해를 못 하겠는 건가? 나만.. 이상하게 느껴..? 싶은 지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영화 장르가 왜 Comedy 지부터 시작해서 주제까지 수업 전에 수많은 의문들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서 의문이 풀리기도 하고, 학우들과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이렇듯 영국에서의 영화 수업들은 한국에서 수강했던 강의들과 달랐다. 그리고 그것이 나는 구조적인 차이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구조가 언제부터 이렇게 확립되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도 아마 많은 시행착오 끝에 이 수업 구조를 가지게 된 거겠지? 대강의실에서 이론 강의를 하고, 많은 분반으로 쪼개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하루에 몰아서 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에 쫓겨서 강의로만 채우고 토의를 하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야기할 시간과 공간은 이미 확보되어있기 때문이다. 또 학교에서 무조건 screening을 제공해주었다. 사실 screening은 출결에 영향이 없었다. 영화를 보기만 하면 꼭 screening에 오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지 못하고 오는 학생들이 없게 screening 시간을 시간표에 정해 해당 영화를 틀어주었다. 대부분 넷플릭스에도 없고 잘 구할 수 없는 영화들이어서 나는 꼬박꼬박 screening에 참여했다. 그리고 다 같이 보는 게 확실히 재미있기도 하다.
학습 환경의 좋고 나쁨보다는 이렇게 차이가 나는 지점이 신기했다. 아마도 영국 대학 내에서도 학교별로 차이가 있겠지만, 이렇게 다른 환경의 대학을 경험해본다는 게 의미 있었다. 내 생각을 정리하고, 그 생각을 모두에게 발화한다. 그리고 다양한 국가에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학우들과 공유한다. 아마도 이러한 시공간이 시스템적으로 확립되어있지 않았더라면 학업적인 대화는 적었을테다. 정말 '교환학생'이 누릴 수 있는 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