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아 Aug 14. 2023

신생아 때가 제일 예쁘다고들 하지만,

정작 엄마는 신생아를 예뻐할 여유가 없다


흔히들 임신과 출산은 축복이라고 한다. 국가가 심각한 저출산 위기에 처한 만큼 실로 임신과 출산을 겪는 동안 많은 관심?과 대접?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당연히 나 역시 기뻤고, 의도치 않아 잠시 놀라긴 했으나 큰 어려움 없이 아이를 가질 수 있어 감사했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휘몰아치는 모든 변화들이 나를 당혹스럽게 했으며 예전 같지 않은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좌절감을 느끼곤 했다.


나는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고, 그 경험을 도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임신과 출산 역시 그런 (안일한) 자세로 임했던 듯하다.

닥치면 다 되겠지..!

실제로 나는 내 진로와 직업, 결혼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용감한 선택들을 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육아에는 그 '닥치면'이 해당되지 않는 듯했다.


드라마에서는 흔히 "우웩-" 하며 구역질을 한껏 손으로 틀어막는 것으로 입덧을 묘사하곤 한다. 하지만 입덧은 그리 단순히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뱃멀미를 경험해 보지 않았으나 그게 어떤 건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으며, 세상에 나는 모든 냄새를 다 없애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지어 남편이 쓰는 '무향' 바디워시조차 역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는 일례에 불과했다. 초기에 느껴졌던 무자비한 피로감과 배가 점점 무거워지면서 짓눌리는 허리와 골반의 통증, 출산이 가까워질수록 거동마저 힘들어지는 무력감까지 나에게는 모두 다 버겁기만 했다. 왜 이 과정을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는지 모두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흔히 임신하면 배가 나오는 데다 여기저기 군살이 붙으면서 살이 다 트고, 유두와 겨드랑이가 까매진다는 (미적인 것과 관련된) 얘기만 흉흉한 소문처럼 나돌곤 했지만 나에겐 그런 걸 신경 쓸 여유 따윈 없었다. 내 삶을 송두리째 인질 잡힌 느낌인데 그깟 겨드랑이가 대수냐.


나는 임신을 하면서 남편과 주위 사람들에게 제왕절개와 단유를 하겠노라 선포했다. 이유는 심플했다. 기왕 힘들 거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싶었다. 자연분만의 고통을 감당하면 평생 트라우마를 겪을 거 같았고, 모유 수유를 지속하면 그 기간 동안 삶이 피폐해질 거 같았다. 물론 내가 주변 사람들의 이런저런 말 얹음에도 이 선택을 확신 있게 밀어 부칠 수 있었던 이유는 내 스스로의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덜 아프고 싶었다'라는 그 말이 코웃음치면서 "요즘 애들은 참 편하게 산다~"라는 핀잔 어린 말로 치부될지 모르겠으나 또한 나도 구구절절 설명하긴 딱히 귀찮아 심플하게 내뱉고 말았지만 사실 내 선택에는 보다 심오한? 이유가 존재했다. 엄마가 되는 것에는 희생이 따른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를 거룩하다고 얘기하겠노라만 나는 엄마의 무조건적 희생이 아이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흔히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육아가 힘든데 도대체 어떻게 행복하라는 말이며, 엄마가 필요한 아이를 두고 자신의 행복만을 찾아 룰루랄라 떠도는 엄마가 행복하다는 말은 아닐 테니까.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아이와 맺는 관계 속에서 불행하면 아이도 불행할 수밖에 없다'가 맞을 것이다. 엄마가 아이와의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이 아이 때문에 내가 이렇게...' 라는 억하심정은 느끼지 않아야 아이가 악영향을 받지 않을 테니까.


모유 수유를 하면서 아이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는 충족감이 가슴이 아픈 것보다 더 큰 엄마가 있을 거고, 제왕절개라는 수술보다 자연분만이 덜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엄마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어떤 게 옳고 그르냐는 하나도 중요치 않다. 여기서 중요한 건, 엄마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으로 고통을 겪게 되면 아이와의 관계에서 불편감과 분노 그리고 억울함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고스란히 아이에게 전가된다. 우리는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엄마 세대의 독박 육아와 가부장적인 문화가 엄마들을 얼마나 히스테릭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 굴레 안에서 엄마의 눈치를 보느라 우리들 역시 얼마나 힘들었는지.


넋두리를 조금 보태자면, 덜 힘들려고 한 그 어떤 선택들도 대충 감당할 만한 건 아니었다. 그 어떤 진통제도 모든 고통을 없앨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며칠은 혼자 일어서기도 힘들 만큼 수술 부위가 아팠으며, 부풀었던 풍선이 제자리를 찾아야 했기에 생전 겪어보지 못한 감각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온몸의 관절 마디가 쑤셨으며 아.아를 달고 살던 내가 따듯한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을 만큼 이가 시렸다. 인체의 신비인지 뭔지 수술한 지 정확히 삼일째가 되자 가슴이 찌릿찌릿하면서 누가 돌덩이를 얹은 마냥 콱 짓누르는 느낌이 시작되었다. 그나마 단유약을 먹어 통증이 일주일 이상 지속되지는 않았으나 매일매일 새로운 통증을 알아가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치열한 육아의 현장


이 모든 지난한 과정을 거쳐 아이를 낳았더니 초점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목도 가누지 못하는 신생아가 나에게 덩그러니 당겨졌다. 내가 손을 떼버리면 정말 죽을 것만 같아 무서웠다. 분유를 먹이는 것도 기저귀를 가는 것도 아직 손에 익지 않고, 그마저도 내 몸은 자꾸 축 늘어져 멍-한데 아이는 미친 듯이 울어젖힌다. 밥 달라, 기저귀 갈아달라, 세상에 태어난 게 너무 힘들다 등의 요구를 해댄다. 미친 듯이 몇 시간이고 우는 아이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현실감이 떨어질 때도 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 어떠한 절경이나 달콤한 음식도 내 심신이 허약하면 이를 고스란히 즐기거나 누릴만한 여유가 없다. 그리하여 엄마는, 이미 임신과 출산으로 피폐해져버린 엄마는 신생아의 그 작은 꼬물거림을 오롯이 예뻐할 여유가 없다. 어쩌면 예쁨을 누리는 것은 조금은 떨어져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누군가의 여유일지도.


내 배 아파 낳은 아이어도 당장은 예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특히나 신생아는 더한 거 같다. 갓 태어난 아이는 부모의 상태가 어떤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생존 욕구를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상호작용(눈맞춤이나 옹알이 같은)이라도 된다면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을 텐데.


그러니 이 글을 보는 엄마들이 있다면 혹시 아이를 보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쁘다'라는 감동이 오지 않더라도, 때로는 미친 듯이 우는 아이를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더라도 부디 자책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건 엄마로서의 여러분이 나약하다는 증거가 아니고, 그냥 그저 너무 힘들다는 거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낮에라도 수면 시간을 확보해야 하며, 텁텁하더라도 끼니를 절대 거르지 말고, 간간이 아이를 누군가에게라도 맡겨놓고 환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아이도 예뻐 보인다. 그리고 충동을 넘어서 정말 까딱하면 무언가를 저질러버릴 것 같다면, 절망의 늪에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주저 말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


아침마다 때려먹는 것들, 살기 위한 나의 몸부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