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져서 무릎이 까이고, 날카로운 물건에 베여서 피를 본 게 아니었다. 흔들리는 치아를 뽑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초등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이를 빼기 위해 치과를 간 건 딱 2번.
유치가 거의 다 빠진 첫째 1번, 둘째 1번.
어릴 적 치과를 가려면 차를 타고 20분을 가야했던 시골 마을에 살았던 나는 이를 뽑기 위해서 치과를 가는 일은 없었다. 흔들리는 이를 묶고 여닫이 문고리에 달아서 확 문을 열면 이는 쏙하고 빠졌다.
그렇게 빠진 이는 오고가는 까치가 물어가서 새 이를 가져 오기를 바라며 지붕 위로 휙 던졌다. 나의 4남매들의 숱한 이들은 여전히 친정집 지붕 위에 있을 것이다.
어릴 적 기억 때문이였을까? 아님, 몸에 베여서일까? 응당 아이들의 이도 흔들리면 내가 빼야하는 줄 알았다. 남편은 이런 일은 익숙하지 않았고, 내가 더 아이 옆에 더 많이 있었기에 자연스레 치아 뽑기는 내 담당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치과에 가기 보다는 내가 뽑아 주는 걸 더 편안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이를 뽑으면서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저번 유치를 뽑을 때부터였다. 피를 보면 볼수록 덤덤해지기 보다는 조금씩의 트라우마가 생겼다. 내 피는 내성이 생기지만 아이들의 피에는 이상하게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내가 대담해져야 함을 매번 느끼게 된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 마주치고 싶지 않은 불편함들을 마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몇 번의 피를 더 봐야 육아는 편해질까? 아마 당분간은 없을거 같다. 하지만 이를 통해 나의 불안한 마음들, 여린 마음들이 꾹꾹 다져진다는 것은 안다. 아이들 육아를 통해서 여렸던, 작았던, 소심했던, 엉성했던 나의 마음이 단단해지고 있다. 힘들지만 그렇게 아이는 커가고, 나도 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