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토 슈타이얼. 김실비 역. <스크린의 추방자들>
45쪽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풍부한 이미지는 점점 더 자신을 창의적으로 저하시킬 수 있는 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자체적인 위계 체제를 정립하였다"
자신을 '저하'시키는 기술에 힘입어 '위계'를 세운다는 것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찾아보니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rich image established its own set of hierarchies, with new technologies offering more and more possibilities to creatively degrade it."
'with'를 '힘입어'로 볼 여지가 있긴 있다. 문장의 뒷부분에 나오는 '신기술'을 이용해서 문장의 앞부분에 나오는 '위계 체제'를 정립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왠지 그런 뜻이 아닌 것 같다. 여기에서 'with'는 그냥, 두 명제의 내용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 아닐까?
한편에서는 [풍부한 이미지는 자체적인 위계 체제를 정립하였다] 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그와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신기술이 풍부한 이미지를 창의적으로 저하시킬 수 있는 점점 더 많은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with를 while의 동의어로 봐야하는 것 아닌 가 싶다.
여담이지만, '이미지를 저하시키다'라는 표현이 과연 자연스러운 한국말인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58쪽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자신의 지위 자체만큼이나 양가적인 빈곤한 이미지는 (...)의 계보를 잇는다."
말이 안되는 문장은 아니다. 그래도 맥락 상 뭔가 이상했다. 원문은 이렇다.
"The poor image—ambivalent as its status may be—thus takes its place in the genealogy of ..."
[빈곤한 이미지는 ~의 계보를 잇는다]라는 명제 속에 [빈곤한 이미지의 지위는 양가적이다]라는 명제를 끼워넣은 구조이다. 그런데 두 명제의 관계는 대립적인 관계이다. '~에도 불구하고'의 관계이다.
"빈곤한 이미지는, 그것의 지위가 양가적일지라도, / 양가적임에도 불구하고, ~의 계보를 잇는다"가 정확한 번역일 것 같다.
'주변화된 내용'으로 번역된 'marginalized content'는 '주변화된 컨텐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