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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빛 Nov 13. 2020

08. 끝, 그리고 시작

선택과 집중을 위하여


#8





애월읍 해안 어딘가






10월 초.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매장이 문을 닫음으로 인한 허전한 마음도 잠시, 나 홀로 떠난 제주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돌아오기 딱 좋은 날씨와 풍경들은 내년에도 또 오겠다는 다짐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돌아온 서울, 나를 반기는 낯선 공간과 낯선 팀원들을 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제 그만두고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할까? 였다.


강남에서 합정으로.

취업을 준비하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가득했던 강남 매장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거나 수다를 떨고 즐기는 합정 매장으로 오니 굉장히 이질감이 들었고 어떤 표정과 말투, 제스처를 취해야 할지도 고민이 되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둬야 할까?라는 생각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합정에서 오마카세 커피 바를 진행해야 했기에 잠시 모든 생각을 접어두고 집중했다.

어떤 코스를 만들어야 할지, 제공 방식은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많은 고민들을 하며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메뉴 구상이 끝나고 오픈 준비에 돌입하려던 찰나,


내 인생에 또 한 번 큰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행복했던 제주도의 10월 초

"합정 매장 리더가 되는 건 어때?"


생각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생각해볼 리가 없는 합정 매장의 리더.

지금의 리더가 다른 업무를 위해 떠나야 하는 상황. 리더와 오마카세 커피 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둘 다 하면 안 되나?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불타는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나에게 너무 익숙한 강남에서 리더와 오마카세 커피 바를 운영하면서도 많이 힘들었고 지쳤었는데, 너무 낯선 이 공간의 리더와 오마카세 커피 바를 동시에?


듣자마자 털이 쭈뼛쭈뼛 서고, 절로 고개가 좌우로 저어졌다.


팀의 규모도 2배가 넘는 이 곳을. 아직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잘 모르는 이 곳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오마카세 커피 바를 포기하고 이 매장의 리더가 되는 게 맞을까? 누굴 위해?

선택을 해야 했고, 선택을 하고 나면 그곳에 집중을 해야만 했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맡은 건 꼭 해내야 직성이 풀리고, 팀으로 일하는 곳에서는 내가 아닌 팀이 우선시 되어야 할 부분들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하고, 내 욕심만 채우려고 하면 회사가 아닌 개인 매장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기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7일. 168시간. 10080분. 604800초.





합정의 브랜드 룸(오마카세 커피 바 진행 공간)

일주일 내내 생각했던 건, 너무 잔인하다는 것.

오마카세 커피 바를 운영하기 위해 왔던 합정 매장인데 제주도에서 쉬고 오니 돌아오는 게 합정 매장의 리더라니. 나는 왜 항상 이런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걸까? 돈을 더 받는 것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왜?라는 생각들이 나를 계속 따라다녔고 그만 두면 안 되냐는 말을 정말 많이 했다. 나 자신에게.


오마카세 커피 바를 다시 시작하기까지도 오래 걸렸다.

2017년 이후, 나의 손을 떠났던 오마카세 커피 바는 매번 제동이 걸렸고 다시 하고 싶다는 의견에도 너의 손을 떠난 거라 이야기해봐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었다. 그러다 오마카세 커피 바를 맡았던 팀원이 그만두고 기억에서 사라져 갈 때쯔음 하고 싶다는 의견을 다시 냈을 때, 그래 그럼 해보자라고 되었던 시스템. 이렇게 할 수 있는 건데 그동안 왜 제동이 걸렸는지, 왜 다른 곳에서 페어링 세트를 만들고 테이스팅 세트를 만들어가는 지금 우리는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대중들에게 비쳐야 하는지에 대한 아쉬움도 컸다. 꾸준히 이어왔으면 정말 좋았을 텐 다라는 생각이 제일 컸던 만큼 지금 멈춰버리면 다신 하지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더 커졌고, 그래서 더 잔인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답은 정해져 있는 것 같은걸.


하고 싶었던 만큼 놓치기 아쉬운 마음.

그런데 잠시 접어둬야 할 것 같다. 나는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직장인이다.





이제 추억이 된 강남의 브루잉 바

합정의 리더가 되기로 했지만, 사실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도 고민이다.

나는 부드럽거나 온화하지 못하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 하고 싫은 건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팀 안에서 혼자 움직이는 건 팀에게 방해된다고 생각하고 분명하게 아니라고 피드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들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고 분노가 되어 뒷말이 많기도 했고..


또, 이런 나지만 이런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던 강남에서는 그래도 의지가 되고 힘이 되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새로운 이 팀에는 나는 이방인일 뿐. 그들에게는 오히려 나의 방식이 낯설고 불편할 수 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아닌 것도 괜찮다고 하고, 피드백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하며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야 하나? 아니 그럴 거면 내가 여기 리더는 왜 하지. 누군가의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건가? 아니 내가 왜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리더가 되기로 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나와 내가 싸웠고, 굉장히 많은 자아가 싸우고 또 싸웠다.

나 잘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왜 잘해야 해? 나 괜찮을까? 아니 안 괜찮을 것 같은데 도망갈까?

분명 힘들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선택한 합정 리더.

쓸데없는 책임감이 그 순간에 빛을 발했고, 나는 그 책임감으로 나 자신을 속이게 되었다.


리더. 하기 싫었다 정말.

강남에서 리더를 하면서 누군가와 무언가를 책임지거나 끌어주는 게 너무 힘들고 버거운 걸 알았고, 특히 나는 누구보다도 그런 무게감을 스스로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에.

이왕 하려면 진짜 멋지게 해야 하고, 대충 할 거면 안 하는 게 맞고, 못하겠으면 처음부터 시작도 말자고 생각하는 나에게 리더라는 직책은 더 무겁다. 나 혼자가 아닌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까지 영향을 받는걸 너무 잘 아니까. 영향을 주려면 좋은 영향을 줘야 하는데 나쁜 영향만 줄 거면 안 하는 게 맞는 것 같고.. 어떤 어려움과 힘든 시간들이 닥칠지 알아서일까? 무턱대고 다 괜찮다고 하던 예전과 다르게 몸을 사리는 나를 볼 수 있었다. 


음, 언제 이렇게 겁이 많아졌지?







그래도 다행인 건, 이미 해봤던 것들이기에 머릿속이 덜 시끄럽다는 것.

훨씬 긍정적이고 안정적인 나의 상태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이 공간과 환경과 사람들이 처음이기에 버벅대고 어려운 것들이 있지만 이전의 나보다 훨씬 안정적임이 느껴진다. 겁이 많아졌지만, 이전보다 훨씬 겁이 없다. 두려울 건 나뿐이라고 생각하고 조금 더 담담하고 단단하게.


함께 있는 사람들에겐 늘 기본만이라도 잘하자고 이야기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혼자가 아닌 팀이 일하는 곳에서는 기본만 잘해도 본전이다. 바리스타의 기본인 청결, 위생, 서비스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우리가 하나둘씩 쌓아가는 것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본기를 잘 다져야만 한다.


나부터 잘하면 된다.

내가 잘하고 남들에게 함께 하자고 해야 설득력이 있고, 내가 더 잘해야 남들도 더 잘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렇게 팀이 만들어져야 하고, 함께 덜 힘들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야 하고 함께 더 즐거울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나는 선택을 하고 집중을 해야겠다고 또 다짐한다.


11월.

새로운 공간의 리더가 되었다.

나와 함께 하는 팀원들이 덜 힘들고 더 즐거울 수 있도록 힘내야 한다.

물론, 나만 힘내면 안 되고 함께 하는 사람들도 힘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사실 못 해도 괜찮다.

못 하겠으면 안 하면 된다.


이렇게 여러 자아가 부딪치며 오늘도 또 지나간다.

새로운 것들을 앞둔 지금. 늘 어렵고 두려운 것들 투성이지만 괜찮다.

이런 거다. 인생. 고작 1/3 정도 살아온 나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지금도 많지만 앞으로 훨씬 더 많아질 내 자아의 개수가 궁금해지지만, 우선 여기까지.



그래,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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