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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소풍 이정희 Nov 10. 2024

가을8,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길 8.

수비리에서 팜플로니아까지(20.4km)

 수비리 숙소에서 주리안 다리 카페까지 10km를 1시간 50분 만에 걸었다. 내가 이러려고 안 했는데 또 스멀스멀 속도를 내고 있다. 일찍 도착해도 예약한 숙소에 체크인도 안되는데 몸에 밴 빨리 말하고 먹고 걷는 습관이 그대로이다.


낚시하는 노인

 두 시간 걷고 처음 만나는 카페 이름이 주리안이다. 작은 개울 돌다리 옆에 고즈넉한 모습이 발을 붙잡는다. 다양한 사람들이 여유 있게 즐기는 모습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와! 와! 부라보!"


 카페 야외 의자에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박수와 환호 소리가 들렸다. 다리 밑에서 물고기 잡는 데 성공한 노인에게 모두들 자기 일처럼 좋아하며 보내는 응원이었다.


 남의 일이지만 자기 일처럼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주리안 카페

 특히, 나이 들수록 자기 안에 매몰되어 경계를 짓고 판단하려 하는데 저들의 솔직한 감정 표현 방식의 근원은 무엇일까


 어제 수비리 시립 알베르게 앞 길거리에서 기타 치며 노래하던 젊은이가 이곳에서 다른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냥 걷기도 힘든 데 기타까지 대단하다.


 리듬에 맞추어 노래를 따라 하는 사람, 박수를 치며 춤을 추는 사람, 주인 따라온 조개 목걸이를 맨 개까지. 모두들 길고 힘든 산티아고 순례길 초반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다. 33구간 중 겨우 3구간의 중간인데도 평생 꿈꾸던 산티아고 걷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리 즐겁게 하나보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하루하루가, 한 걸음 한 걸음이 즐겁고 소중하여 행복하다. 그래서 천천히 산책하듯 걸으며 보고, 몇 천년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음미하고 싶다.


'어쩌면 다시 못 올 수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해서'


 꿈을 꾸고 준비하며, 용기를 내어 도전하고 그리고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이 의미 있는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노 주인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 걷는 충견


 오늘은 8시 40분 늦게 출발해서인지 한국 사람은 한 명도 못 만나고 서양 노인 부부들을 많이 만났다.


 거의 70대가 넘은 부부들이 이야기하며 나란히 걷고, 앞뒤로 기다려 주는 모습이 대단하고 아름다웠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하고 저 나이에 산티아고 걷기를 나란히 도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페인도 한국처럼 날씨 변화가 심하다. 먹구름이 끼었다가 반짝 해가 떠서 청명한 하늘이 되었다가 번득 보슬비가 내리기도 한다. 벌써 여름이 지난 듯 선선한 기온에 나뭇잎 색깔이 변하기 시작했다.


 해가 밝은 길가에 보라색 블루베리와 빨간 산딸기가 꽃처럼 환하다. 피레네산맥 준령 무성한 수풀 사이에서 줄기차게 흐르는 개울물은 얼음같이 차다. 서늘한 물의 기운은 숲 속을 초록의 고사리와 연둣빛 이끼 세상을 이루었는데 제주 곶자왈보다 더 음습하다. 어두운 숲에서 앞서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이 맞는 걸까?'

'멈추어 사람을 기다려 볼까?'

'뒤돌아 다시 갈림길까지 갈까?'


 혼자 걷는 것은 불안과 자유가 혼재한다.

어떤 것이든 원인과 결과, 선택과 책임이 따른다.


바게트를 지고 캐릭터를 단 배낭
국기, 빨래망을 매단 배낭

 순례자들이 많아 뒷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가방을 메고 가는 뒷모습도 참 다양하다.


 자기 나라 국기를 달고 가는 사람, 젖은 빨래나 신발을 묶고 가는 사람, 먹을거리를 꽂고 가는 사람, 좋아하는 캐릭터를 그린 사람 등등.

오늘의 점심은 숲속 생과일 쥬스


 파리를 출발한 후 처음으로 팜플로니아라는 큰 도시에 입성했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처럼 두 칸 버스가 시내를 다니고 제법 큰 건물들이 많아 볼거리가 많았다. 오래된 건물들과 새로 지은 건물들이 세련되게 통일되어 도시를 더욱 정갈하고 아름답게 한다. 사람들의 모습도 지금까지의 스페인 사람들과 달리 경쾌하다.

순례길이 아닌 시내 대광장 근처에 있는 숙소를 찾느라 1시간은 더 걸은 것 같다.


 하루 내 25km를 걸으며 지쳐 초췌한 내 모습이 광장 입구 화려한 자라 매장 유리 진열대에 비추었다. 나 같지 않은 모습에 한참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는 나,

남이 모르는 나,

남은 아는데 나만 모르는 나---'


 시골 알베르게 2층 침대에만 머물다가 도시의 호스텔에 오니 시설이 많이 다르다.

 침대 칸막이와 물건 보관 서랍 열쇠, 커피 프리 서비스, 야외 테라스에 소파까지 운치가 있어 좋았다. 이제는 1층 침대와 칸막이에도 편안함을 느끼고 감사하다. 2박 조식 제공에 44유로인데 공용공간에서 식사 조리도 가능해서 괜찮은 것 같다.


 론세스바에스에서 보았던 한국 젊은이 커플과 모녀 커플, 나처럼 혼자 온 아가씨까지 한국 사람이 많았다.

연박이니 여행 와서 처음으로 겉옷까지 세탁을 하기로 했다. 세탁과 건조가 8유로라고 하여 오지랖 넓게 내 빨래에 모두 모아 한 번에 해결했다. 어차피 할 것 인심을 쓰니 모두 좋아하며 친해졌다.

테라스 저녁 만찬

 우리는 서로 비 오는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고생한 이야기와 며칠 동안 지낸 다양한 알베르게 경험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팜플로니아 시내 한국 식품을 파는 아시아 푸드 마켓, 맛집 영업시간, 유명한 헤밍웨이 바 위치, 내일과 앞으로 여행 코스까지.


  5시 반 모녀와 함께 외출하여 아직은 썰렁한 중앙 광장을 지나 중국인 가게를 찾아갔다. 한국 여행자들이 많았다. 와인의 나라 스페인에 와서 소주를 사며 너무나 좋아하는 한국의 아저씨들을 보았다.


 우리는 여기에서만 파는 너구리 라면과 계란, 김치를 사고 샐러드와 과일, 과자는 옆골목 까르푸가 더 싸고 물건이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호스텔의 한국인들은 스페인 음식이 정말 맛있고 유명한데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한국의 너구리 라면에 계란 넣고 끓인 냄비에 코를 박고 있다며 신나게 웃었다. 8유로에 산 볶은 김치와 1유로에 산 채소 한 봉지에 올리브유, 식초와 소금, 설탕을 뿌린 샐러드가 어찌나 맛있는지 상상조차 못 한 즐거움을 주었다.


 스페인 요리는 계속 먹을 수 있지만 팜플로니아를 벗어나면 한국 라면과 김치를 먹기 힘들기 때문에 우리들은 정말 맛있게 먹었다. 국물까지 빠른 속도로 흡입하며 쩝쩝거렸다.


여행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고
새로운 시간과 사람을 만든다.

그래서
 나는 혼자 하는 여행에 흥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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