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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켠서 Jul 19. 2022

낮에는 유령도시, 밤에는 차이나타운

기이한 해안도시, 시아누크빌

새벽 세시 반.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누군가가 마이크에 대고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내가 뒤척이자 A가 밖의 소음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다며 짜증 섞인 말투로 투덜댔다.


전날 제트스키도 탔고 밤바다에서 스노클링도 했던지라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린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었다. 게다가 이날은 A의 새 학기 개강날이었다. 캄보디아와 한국 사이의 두 시간 시차를 반영해 A는 아침 7시부터 강의에 참여해야 했다. 아무리 온라인으로 진행된다지만 교환학생 신분으로 새 학기 첫 수업을 해외에서 들어야 한다는 게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엄청난 소음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음악과 노랫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숙소 안에서 파티가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잠드려는 나와 달리 A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참다못한 그가 내게 물었다.

-내가 밖에 나가서 조용히 좀 해달라고 할까?


지금은 아주 늦은 밤. 한국이었다면 또 모르겠지만 현지 언어도 모르는 이 타지에서 자칫하다 위험한 일이 생길까 봐 그를 말렸다. 이 시간까지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부르며 놀고 있는 사람들이 제정신이거나 맨 정신 일리가 없으니 말이다. 조금 있으면 저 사람들도 자러 갈 거라며 A를 달랜 나는 금방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 여섯 시 반. 설핏 잠에서 깬 나는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음악과 노랫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뭐야, 저 사람들 아직도 저러고 있어?

기가 차다는 듯 내가 말하자 A가 화가 단단히 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 진짜 한숨도 못 잤어.


이제 날이 밝았으니 나가서 무슨 상황인지 봐야겠다며 A가 주섬주섬 방을 나섰다. A를 혼자 보낼 수 없었던 나도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부랴부랴 슬리퍼를 신고 그를 따라 나갔다.


방 문을 열고 나오니 어제와 달리 부산스러운 분위기가 확 느껴졌다. 같은 숙소에 묵고 있던 다른 투숙객들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눈치였다. 이른 아침부터 이게 웬 봉변이람.


우리는 하도 음악소리가 크길래 숙소 안 레스토랑에서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곳은 숙소 밖이었다. 숙소 입구 쪽으로 걸어가니 이 소음의 주인공이 보였다. 바로 맞은편 도로에서 한 취객이 대형 스피커를 켜 놓은 채 마이크에 대고 계속 노래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용히 해달라고 해 봤자 말이 통하지 않을 상대니까 아무도 손도 못 쓰고 있는 것이란 게 그냥 딱 느껴졌다. 어딜 가나 이상한 사람들은 있구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A도 인상을 찌푸리고 한숨을 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섰다. 제정신이 아니든 맨 정신이 아니든 외국인인 우리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호텔 직원들은 아직 출근을 하지 않은 듯했다.


다행히 A의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남자가 음악을 끄고 조용해지기는 했지만 A는 꽤 화가 났다. 잠을 설친 데다가 개강 첫 수업을 해외에서 듣는 것도 걱정인데 처음부터 마음에 쏙 들지 않았던 숙소였으니 그럴만했다. 어차피 체크아웃을 하는 날이라 A의 수업이 끝나는 대로 조식을 먹고 다른 숙소로 옮기기로 했다.  


이날, 시아누크빌 내 다른 숙소로 가지 않고 다른 도시로 이동했더라면 남은 우리 여행이 조금 더 순탄했을까?


하지만 우리가 시아누크빌을 바로 떠나지 않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코롱 섬을 방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날 저녁에 내가 참석해야 하는 화상회의가 있었기 때문에 이날까지는 인터넷 연결이 좋은 곳, 그러니까 육지에 있어야 해서 섬에 갈 수가 없었다.


간밤에 있었던 소음으로 화가 난 A는 체크아웃 시간 전이라도 되도록 빨리 여길 떠나고 싶다며 시내 쪽 숙소를 검색했다. 이제 여행 10일째, 아직 한 번도 빨래를 돌리지 못한 우리였기에 나는 세탁기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이 없었다.


우리는 이 도시에서 하루를 더 보내는 김에 시내 쪽 숙소를 예약했다. 세탁기도 있고 옥상에 수영장도 있다고 해서 괜히 기대가 됐다. 캄폿에서 떠나왔던 날처럼 짐을 싸고, 체크아웃을 한 뒤 우리는 오토바이에 올랐다.


평일 낮, 시내 도로는 나름 한가했다. 예약한 숙소로 올라가는 길이 눈에 잘 띄지 않아 조금 애를 먹기는 했지만 제대로 도착했다. 올라오는 길이 가파른 언덕에다가 숙소가 그 언덕 꼭대기에 있어 경치 하나는 좋겠구나 싶었다.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 입구로 들어가니 중국어와 영어, 그리고 한국어(!)로 적힌 안내가 눈에 띄었다. 체크인을 도와준 직원도 캄보디아인이 아니라 중국인이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캄보디아의 다른 도시들과 달리 이곳 간판들은 거의 중국어로 적혀 있었기 때문에 놀랍지는 않았다. 시아누크빌 시내에 위치한 호텔들의 이름이 중국어로 적힌 걸로 볼 때 도심 내 대부분의 숙소는 중국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 같았다.

그럼 한국어 안내는 한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걸까?


우리가 묵을 방에 들어서자 그 실마리가 풀렸다. 여긴 호텔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는 오피스텔이구나! 에어비앤비로 예약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한국인들도 이곳 부동산에 투자하는구나 싶어 신기했다.


예상했던 대로 방의 전망은 좋았지만 도시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텅 빈 건물들이 눈에 들어와 기묘한 느낌이 났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도시를 바라보니 곳곳에 세워진 타워크레인들이 더 잘 보였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공터에 난 거대한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었다. 이곳에도 건물을 지으려다가 중단한 것 같았다. 꽤 깊어 보이는 그 웅덩이에 고인 물은 왜 또 이리 파란지. 왜인지 섬뜩하고 무서웠다.


꼭대기 층에 있다는 수영장을 구경하고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곳곳에 한국어로 적힌 안내가 눈에 들어왔다. 수영장에서는 시아누크빌 항구와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바닷가 쪽으로는 뼈대만 지어진 건물들이 더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런 건물들 사이사이 판자로 지어진 집들과 걸려있는 빨래들도 보였다.

방으로 돌아온 뒤 A는 지난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하다며 짐을 대충 풀자마자 곧바로 침대에 눕더니 잠에 들었다. 나는 세탁기가 있어 드디어 빨래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쁘던지! 그동안 모아둔 빨래 중 흰 빨래들만 먼저 세탁기에 돌린 뒤 하나하나 옷걸이에 걸어 말려두었다. 시아누크빌로 오는 길에 흙먼지를 뒤집어썼던 양말들은 아무리 빨아도 꼬질 하게 물든 흙 자국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꽤 뿌듯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도시가 유명 휴양지라는 소문은 거짓인 것 같았다. 포털 사이트에 시아누크빌을 다시 검색해봤다.


유럽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조용한 휴양도시가 원래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 2019년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인들이 투자하기 시작하면서 도시 전체가 공사판으로 변했고 도시의 현지 인구수만큼 중국인들이 유입되면서 월세도 치솟아 현지인들이 시아누크빌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어로 적힌 간판들이 왜 시내에 그렇게 많은지 이해가 됐다.


A와 함께 여행 계획을 짤 때는 늘 영어로 검색을 했었기 때문에 몰랐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면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줄어 이런 정보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나 보다. 중국 자본에 의해 이렇게 건물들이 세워지고 또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공사가 중단되면서 도시 전체가 유령도시처럼 변한 거였다. 모두 지난 몇 년간 벌어진 일이었다.


해양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중국의 정치적 전략이라고도 하니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개발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 도시는 내 기대와는 정말 다른 곳이 되었나 보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A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근처에 있는 쇼핑몰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사실 점심으로 피자를 먹으려 했는데 지도에 멀쩡히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가보니 문을 닫았는지 레스토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처음에는 우리가 잘못 찾아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까 포털사이트에서 본 뉴스가 떠올랐다. 현지인들 뿐만 아니라 이곳에 터를 잡았던 유럽인들도 시아누크빌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이 진짜인가 보다.


주차할 곳을 찾으려 쇼핑몰 주변을 빙빙 돌다가 주차장을 찾아 주차권을 끊고 나왔다. KFC도 있고 버거킹도 보인다. 캄보디아에 온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깔끔한 느낌의 신식 쇼핑몰에 괜히 놀라 감탄이 나왔다. 이런 것에 질려 서울을 떠나고 싶었는데 갑자기 들뜨는 마음이 드는 건 왜였을까.

점심 메뉴를 고민하던 우리는 KFC를 가보기로 했다. 외관상으로는 여느 KFC 체인점과 다를 바 없었지만 뭔가가 살짝 달랐다. 그래도 워낙 이런 패스트푸드 체인점은 어딜 가나 비슷하니까, 메뉴가 조금 다른 것 때문에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버거를 한입 베어 문 A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너무 맛이 없다는 것이다. 치킨버거가 맛이 없으면 얼마나 없겠냐지만 정말 별로였다. A와 나는 이 KFC가 진짜 KFC가 맞는지, 아니면 로고와 이름만 그대로 베껴 놓은 '짝퉁'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 도시에 드는 불신 때문에 그런 의심이 들었는지 아니면 정말 합리적인 의심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비쌌지만 맛은 없었던 햄버거 세트로 끼니를 때운 우리는 숙소로 다시 돌아가기 전 근처 편의점이나 가게에 들르기로 했다. 쇼핑몰에서 가까운 곳에 작은 가게가 있길래 오토바이는 주차장에 그대로 두고 걷는 걸 택했다. 이제 한낮의 캄보디아는 걸어 다니기 어려울 만큼 뜨거운 날씨가 되어 있었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지 않아 푹푹 찌는 더위가 그대로 느껴지는 가게 안.

맥주와 컵라면, 그리고 물과 환타를 샀다. 한국 라면이 인기인지 어디서든 쉽게 한국식 라면을 구할 수 있는 게 놀라웠다.


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옥상에 있는 수영장에서 더위를 식히기로 했다. 수영복을 입고 수건을 두른 채 올라갔는데 우리뿐이라 전세 낸 느낌이었다. 여기가 좀 이상한 도시이기는 해도 이렇게 저 멀리에 바다가 보이는 수영장에서 웃고 떠들며 마음껏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수영을 가르쳐주겠다는 내 말에 흔쾌히 배우려는 의지를 보이던 A는 여러 번의 연습에도 별 차도가 없자 금방 풀이 죽었다. 왜인지 손과 발이 엇박자로 나가는 것이 귀엽고 웃겼다. 이렇게 우리 밖에 없는 한적한 수영장에서 우리는 맥주도 마시고 사진도 찍으며 둘이서 신나게 물놀이를 했다.

생각지 못했는데 다시 보니 루프탑이 서향이라 정신없이 놀다 보니 슬슬 노을이 지는 걸 볼 수가 있었다. 한 시간 반이나 놀았으니 이제 그만 내려가자며 짐을 다 챙기고도 우리는 한참 동안 주변 풍경을 구경했다.


내가 현지시각으로 저녁 여섯 시 반에 온라인 회의가 있었기 때문에 저녁은 그 후에 먹기로 했다. A가 그래도 시아누크빌 시내로 숙소를 옮겼으니 밖에 나가서 맥주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다길래 오토바이는 두고 툭툭을 부르기로 했다.


내가 한 시간 반 가량 진행된 회의에 참석하는 동안 A는 혼자 이것저것 찾아봤는지 자기가 도심에 있는 피자집도 알아놨고 '우버'처럼 툭툭을 부를 수 있는 앱도 찾았다면서 들뜬 목소리로 얼른 나가자며 나를 재촉했다. 덕분에 나도 한껏 신이 났다.


그가 찾았다는 툭툭 앱으로 툭툭을 부르니 굳이 값을 흥정할 필요가 없어 좋았다. 거리에 따라 자동으로 금액이 측정되니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내가 부른 툭툭인지만 확인하고 탄 후 내릴 때 돈을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완전 최고!


A가 찾아둔 피자집은 캄보디아에 도착한 후 몇 번 본 기억이 있는 프랜차이즈 피자 레스토랑이었다. 페퍼로니 피자를 좋아하는 우리답게 페퍼로니 피자 한 판과 콜라를 주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오랜만에 밖에서 맥주를 마실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고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할 거라 생각했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근처 펍이나 간단하게 맥주를 마실 만한 음식점을 찾는데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지도 앱으로 확인할 수 있는 리뷰가 오래전 리뷰일 경우 우리가 점심에 가려고 했던 음식점처럼 사라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른 곳들은 중국어나 크메르어로 적혀있어 우리가 갈 만한 곳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거리는 중국어로 적힌 네온사인으로 번쩍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여기가 중국인지 캄보디아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와, 여기 그냥 중국 같아.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중국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A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중국과 캄보디아의 혼종. 우리가 캡과 캄폿에서 느꼈던 캄보디아만의 분위기는 사라지고 꺼림칙한 느낌만 맴돌았다. 이 도시가 주는 느낌은 정말이지 이상했다. 있으면 안 될 곳에 있는 기분이었다.


도시와 우리의 주파수가 서로 맞지 않아서일까? 우리는 이 도시에 속하지 않고 도시도 그런 우리를 자꾸 밀어내는 듯했다.


끙끙대며 휴대폰으로 지도만 들여다보고 있는 내게 A가 말했다.

-그냥 한 번 걸어보자. 뭐라도 나오겠지.


A도 나도 얼마나 이곳이 중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는지를 체감하며 거리를 걸었다. 갑자기 거리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여기 분명 중심가가 맞는데... 밤 열시도 되지 않은 시각, 도심이라면 이렇게 어두울 리가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가 익숙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숙소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농협은행도 봤고 숙소 내에 붙은 한국어 안내도 봤지만 갑자기 걷다가 불이 켜진 '명랑 핫도그' 가게를 보자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더라.

아무튼 우리는 마땅히 들어갈 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걷자니 이 밤에도 내려가지 않은 기온 때문에 힘이 들기도 하고 거리 분위기가 좋지 않아 길을 걷는 게 꺼려졌다.


대충 구글 지도에서 찾은 펍을 목적지로 찍고 툭툭을 불렀다. 한 번 가보면 알겠지 싶은 심정이었다. 엄청나게 끓는 가래를 뱉어 대는 젊은 남자가 운전하는 툭툭이었다. 툭툭은 점점 목적지가 위치한 골목으로 들어가는데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툭툭이 멈춰 섰다. 역시나 다 쓰러져가는 건물만 남아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곳이었다. 여기가 맞나요? 하는 내 물음에 툭툭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길을 떠날 뿐이었다. 지도 앱을 확인하니 여기가 내가 찾아온 그곳이 맞았다. 그러면 뭐해, 아무것도 없는데.


A는 당황스러운 듯 주위를 둘러보는데 내 머릿속에 아까 툭툭을 타고 지나오며 본 곳이 떠올랐다. 대충 외관이 펍 같은 게 눈에 띄었던 것이다.


-아까 툭툭이 모퉁이를 돌기 전에 펍처럼 보이는 곳이 있었어! 거기 한 번 가보자!


A의 손을 잡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멀지 않은 곳에 내가 보았던 술집이 있었다. 안에 손님들도 있고 외관상 멀쩡해 보이는 지라 잠깐 밖에서 기웃거리던 우리도 술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간판을 읽을 수 없으니 외관만 보고 들어온 나는 그곳에서 서빙을 하던 여종업원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뭔가를 읽었다. 여긴 너희가 있을 곳이 아니야!


그녀들의 표정을 읽자마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술집이 아니구나. 뭐가 됐든 나가야겠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는 A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기, 우리가 생각하는 술집이 아닌 것 같아. 뭔가 좋지 않아. 나가는 게 낫겠어.


대충 얼버무리며 A의 손을 잡고 술집을 서둘러 빠져나오자 아까는 보이지 않던 거리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기도 분명 시내라면 시내가 맞는데. 제일 번화가가 맞는데.


그런데 거리 분위기가 왜 이러지?


뼈대만 세워진 건물들에도 사람들이 사는지 걸려있는 빨래며 그 앞에 피워진 모닥불이며 눈길을 잡아끄는 것들이 많았다. 현지인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주위에 많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그들의 눈길을 끌었는지 그 거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불이 켜진 가게들은 곳곳에 보였지만 그 건물들 너머에 세워진 빌딩들은 껍데기만 남은 유령처럼 어둠 속에 고요히 파묻혀 있었다. 돌아보면 꽤나 소름이 돋을 만한 장소에 우리가 있었던 건데, 정작 그곳에 있던 나는 별로 겁이 나진 않았다. 그저 오토바이를 타고 올 걸-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래서 다들 캄보디아는 도보 여행으로 적절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리를 걷고 있는 우리에게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쌍둥이 소녀 둘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똑같이 생긴 강아지를 각자 꼭 껴안은 채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 아이들이 너무 예뻐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회색빛 거리 풍경이 아이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이런 동네를 쉽게 접한 적 없었기에 별로 겁먹지 않은 나와 달리 영국에서 자란 A는 우리가 너무 이목을 끌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는 고민 끝에 전날 낮에 방문했던 해변으로 가보기로 했다. 해변이니까 당연히 펍이나 레스토랑 몇 개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마 이 도시 전체가 우리 둘을 속이기로 작정한 게 아니고서야.

다시 툭툭을 잡아 세렌디피티 해변으로 향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해변 쪽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해변을 걸으며 들어갈 만한 곳을 찾아보자며 A를 이끌었는데 엄청난 인파의 중국인들이 해변 위 식당들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어와 크메르어로 쓰여 있어 뭐가 뭔지도 알아볼 수 없는 메뉴들, 걸어가는 내내 꽃을 사라며 달라붙는 사람들, 덥고 습한 날씨에 귀가 멎을 듯 큰 음악소리까지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식당이 한두 개도 아니고 거의 해변을 따라 계속 이어지는데 각기 다른 음악을 틀어놓으니 이렇게 소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앞으로 식당들이 쭉 이어졌지만 선뜻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 인파에 압도된 기분이었다. 평일 저녁에 천 명은 될 숫자의 사람들이 해변에서 게걸스럽게 밥을 먹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기묘했다.


아까 전 뼈대만 남은 건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도시는 유령도시가 되었고 밀려난 사람들은 유령처럼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배경에 스며들지 못했다.


-여기 있고 싶지 않아. 그냥 나가자.

시끄러운 음악과 현란한 불빛에 시달릴 만큼 시달린 우리는 이십 분가량 걷던 해변을 벗어나 도로변으로 나왔다. 여긴 또 왜 이리 어둡고 아무것도 없는지, 불이 켜진 카지노 하나를 제외하고 우리 주위에는 텅 빈 건물들 뿐이었다.


피자 레스토랑에서 나온 지 한 시간 반이 넘었지만 아무것도 마시지도 못했다. 이날 저녁이 이렇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다. 이 도시는 예상을 뛰어넘는 곳이구나.


A가 목이 마르다며 가게에 들러서 숙소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 차라리 맥주를 사서 숙소에서 한잔 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며 가게를 찾아보는데, 없다. 편의점이나 마트는 고사하고 작은 구멍가게나 가판대조차 없더라.


우리는 다시 십여분 정도를 걸어 전날 낮에 환타를 사 마셨던 가게를 찾아갔다. 아까 툭툭에서 내렸던 해변 입구가 보였다. 그때 그냥 숙소로 돌아갈 걸. 후회만 들었다.


물과 맥주 네 병을 사서 툭툭을 새로 잡아 타고 숙소로 돌아오니 열한 시가 넘었다.

저녁을 먹은 후 두 시간 가까이 이 유령도시를 헤매기만 한 셈이다. 이 습하고 더운 날씨에 계속 걸어 다녔더니 기진맥진했다. A도 나도 우리가 기대했던 신나는 저녁을 보내지 못했다. 오히려 할 말을 잃은 채였지만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도시는 정말 이상하다고, 정말이지 기묘한 곳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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