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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켠서 Aug 29. 2022

이 나라에서는 왜 쉬운 게 없냐, 진짜.

미지의 이사나푸라, 캄퐁톰

오늘은 썸보 프레이 쿡 유적을 보러 가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캄보디아 식으로 준비된 조식을 먹었다. 로비 옆에 있는 식당에서 체크인할 때 받은 티켓을 내밀고 들어가니 비즈니스 룩으로 차려입은 현지인 관광객들이 이미 식당을 꽉 메우고 있었다. 숙소가 조용했던지라 이렇게 많은 손님이 머물고 있는지는 몰랐는데. 겨우 자리를 잡고 앉은 우리에게 직원이 따듯한 차와 메뉴판을 가져다줬다. 조식으로 주문이 가능한 메뉴는 서너 개 정도인데, 음료도 무료로 같이 주문할 수 있었다.


아까 새벽같이 일어나 온라인으로 수업을 듣느라 이미 커피를 세 잔이나 마신 A는 허니 레몬티와 닭고기 볶음밥을, 나는 카페라떼와 볶음면을 주문했다. 동남아 음식이 특별히 느끼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질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아직 후각이 돌아오지 않아서일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유적지에 갈 준비를 하면서 토요일에 받을 PCR 검사도 미리 예약하기로 했다. 물론 며칠 전에 바로 병원을 방문했던 것처럼 예약 없이 당일 방문이 가능한 곳도 있기는 하지만 보통 출국용 PCR 검사가 130달러인데 반해 미리 예약을 하면 80달러에 검사가 가능한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메일을 보내 예약하거나 해당 검사센터 홈페이지에서 바로 신청할 수도 있는데 생각보다 예약 신청서에 적어야 할 정보가 많아 번거롭기는 했다.


썸보 프레이 쿡 유적군으로 향하기 전, 우리는 시내에 있는 캄퐁톰 시장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큼직한 간판에 "KAMPONG THOM MARKET"이라고 쓰여 있기에 찾기가 쉬웠다.


내가 캄보디아에서 깨닫게 된 것들 중 하나는, 내가 시장을 정말 좋아한다는 거였다. 신기한 골동품들은 물론이고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이나 야채들도 있고 시끌벅적하게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라 좋다. 이전에도 해외여행은 꽤 해봤지만 시장은 둘러본 기억이 없다. 왜 굳이 캄보디아에서 시장에 빠지게 된 걸까, 잘 모르겠다.


시장 앞에 오토바이를 주차하고 내린 뒤 먼저 약국을 찾았다. 후유증 탓인지 계속 잔기침이 나오는데 기침약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필 사람이 몰리는 시간대였는지 줄이 길어 한참을 기다렸다가 원하는 약을 얻었다.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아빠를 도와 돈을 계산해주고 있었다.


-이제 가자. 유적지 보러.

약을 챙긴 뒤 시장 주변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고 있던 내가 이렇게 말하자 A가 물었다.

-시장에 가고 싶은 거 아니었어?


시장에 가고 싶었다, 당연히. 그런데 문제는 이날 한낮 기온이 너무 높아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였다는 것이다. 휴대폰으로 날씨를 확인했다. 체감온도 41도. 에어컨이 없는 시장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선뜻 나지 않는 날씨다. 그냥 오토바이 위에 올라 시원한 바람이나 쐬고 싶었다.


-너무 더워. 그냥 가자. 유적 보러.

내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시장에 별 감흥이 없는 A는 이런 내 말이 은근히 반가운 눈치였다. 캄퐁톰 시내 시장에서 썸보 프레이 쿡 사원까지 예상시간은 약 40분 정도. 중간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길가의 노점에서 물과 박카스를 사 마신 시간을 포함해 실제로는 딱 한 시간 정도가 걸렸다. 마침 우리가 잠깐 앉아 쉬고 있을 때 소떼가 우리 앞에서 도로를 건너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것도 보았다. 우와, 신기해.


다시 유적지로 향하기 시작하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포장되어 있던 길이 끝나며 비포장 도로가 이어졌다. 그래도 사실 이번 로드트립에서 겪었던 다른 도로들과 별 차이가 없었긴 했다. 굳이 다른 점을 꼽자면 흙먼지의 규모랄까. 도로가 내뿜는 흙먼지가 얼마나 심한지 옆으로 난 나무들의 이파리가 흙에 뒤덮여 불그죽죽한 색을 뗬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적한 붉은 흙길 주위로는 나무들이 빽빽하고 먼지 때문에 뿌연 시야에 햇살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정말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캄퐁톰으로 짧은 여행을 결정한 것도 다 이 유적지를 보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기대가 컸다. 공부는 따로 하지 않은 터라 이곳에 대해 아는 건 고작 앙코르와트가 생기기도 전에 지어진 아주 오래된 고대 유적이라는 것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주위로 더 신비로운 분위기가 풍겼다. 키가 큰 나무들 사이사이로 무너져 가는 유적들이 보였다. 유적군이라더니, 정말 하나가 아니었네. 들어오는 입구부터 나무 사이로 보이는 고대 유적들에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수명이 유적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들도 몇 그루 보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운전해 들어오는 우리를 본 직원 몇 명이 오토바이를 멈춰 세웠다.


-티켓? 티켓 있어요?


두 유 해브 어 티켓? 그들이 큰 소리로 우리를 향해 물었다.

어라, 여기 들어오려면 입장권이 있어야 해? 나와 A는 당황해서 직원들에게 되물었다.

-티켓을 어디서 파는데요?


친절한 직원들은 우리가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면 매표소가 있을 거라고, 거기서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오면서 매표소 같은 거 못 봤는데. 당황한 우리는 미끄러운 흙길에서 급하게 오토바이를 돌리려다가 그대로 자빠질 뻔했다. 물론 엄청 느린 속도였지만 말이다.


-매표소 같은 거 본 기억이 없는데? 너는 봤어?

내 물음에 A가 고개를 저었다. 왔던 길을 돌아가면 매표소가 보일 거라는데 얼마나 가야 매표소가 나오는지, 어디쯤에 매표소가 있는지 정말 감이 오지 않았다. 썸보 프레이 쿡으로 오는 길에 건넜던 작은 다리가 보이는 곳까지 다시 돌아가 봤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다리를 건너 저쪽까지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그러면 매표소랑 유적지가 서로 너무 멀지 않아? 뭔가 이상한데.


도대체 어디까지 돌아가야 표 사는 곳이 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거다. 아리송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유적지로 돌아갔다. 아까 직원들이 우리를 멈춰 세웠던 곳이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생각해 거기까지 가기 전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숨을 돌렸다. 매표소가 어디냐고 직원들에게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똑같은 대답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막막했다.


그럼에도 우리를 둘러싼 풍경 하나는 정말 최고였다.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유적들이 신비롭게 서 있다. 아니, 존재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켜왔을 저 붉은 벽돌 하나하나가 신기하다. 표를 사야 저 유적들을 가까이서 구경할 수 있을 텐데.


코로나 여파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곳은 정말 관광지나 유적지 치고 조용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도 고작 몇 년 전인 2017년이다보니 아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


밀림 속에서 평화롭게 유적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라더니 이런 분위기 때문인가 보다. 타들어갈 듯 더웠던 날씨도 이렇게 키가 큰 나무들 옆에 있자니 조금 더 시원하게 느껴졌다.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 소리가 들릴 것도 같았다.


아이들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나들이를 나온 현지인 가족들이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무언가에게 관심을 주길래 유심히 쳐다봤더니 원숭이였다. 사람들이 주는 빵을 받아먹던 원숭이가 길을 건너 쪼르르 달려오더니 바위에 앉는다.

내가 원숭이에 정신이 팔린 사이, 오토바이를 제대로 다시 주차한 A가 어디론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가 간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엄청난 모습의 사원이 눈에 들어왔다.


사원을 본 나는 이틀 전 여행 계획을 세우던 중 A가 내게 보여줬던 사진을 기억해냈다. 여길 가보는 게 어떻겠냐며 그가 보여줬던 유적지 사진 중에 이 사원이 있었다. 결국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것도 이거였는데, 당연히 기억할 수밖에.

거대한 나무가 사원을 휘감은 형태로 하늘을 향해 우뚝 자라나 있었고 앙코르와트보다도 더 전에 지어졌다는 고대 국가의 사원은 나무와 한 몸이 되어 그에게 우두커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아직까지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무의 모습이 마치 사원의 또 다른 영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크다. 사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A가 감탄하며 올려다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원 주위를 돌아보는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이 있다. 어떻게 나무뿌리가 문만 딱 피해서 자라난 걸까. 넋을 놓고 나무와 사원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우리를 불렀다.


옅은 갈색의 경찰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A와 나를 향해 거기서 나오라는 손짓을 계속했다. 잔뜩 놀란 얼굴로 그에게 다가가니 그가 우리에게 묻는다.


-티켓은요? 입장권 좀 보여주세요.


아, 티켓.

-매표소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못 들어가고 있었어요. 표를 팔기는 하나요?

A가 묻자 경찰이 인상을 팍 썼다.


-지금 당신들이 들어간 곳도 유적지예요. 티켓이 없으면 가까이 가면 안 되죠.

나와 A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에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그가 옆에 있던 직원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더니 우리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까 직원들이 지키고 있던 입구로 들어갈 때만 입장권이 필요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길 옆으로 그냥 보이는 사원들이 몇 개 있길래 여기는 표가 없어도 되는 줄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사실 별생각 없이 홀린 듯 사원에게 가까이 가버린 거였다.


경찰이 잔뜩 화가 난 것 같아 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매표소를 찾으러 가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는 우리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티켓을 안 사면 벌금을 매길 거에요.

그가 벌금은 50달러라고 단호하게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오토바이 타고 저 따라오세요.


그렇게 우리는 갑자기 경찰을 따라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그가 고개를 돌려 우리가 잘 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뭐야, 도망이라도 칠까 봐? 우리도 표 사고 싶었거든요? 마치 큰 범죄라도 저지른 듯 우리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경찰이 아까 우리가 건너온 다리를 건너길래 설마 경찰서로 데려가는 건 아니겠지 싶어 잔뜩 긴장했다. 다리를 건너간 그가 방향을 틀더니 오토바이를 세웠다. 매표소였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구나.


뒤이어 우리가 오토바이에서 내리자 경찰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표를 사라고 눈치를 줬다. 입장권 가격은 인당 10달러. 선한 인상의 매표소 직원은 이미 경찰에게 짧게 상황 설명을 들었는지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쓰고 있던 헬멧을 벗어 그녀 앞에 올려둔 뒤 카드를 내밀며 입장권을 두 장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눈빛에 당혹스러움이 스쳤다.


-카드...... 안돼요. 현금만 돼요.

-저희, 지금 현금으로 20달러는 없는데요.

나도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떡하지. A를 쳐다보니 A도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던 경찰관에게 말했다.


-카드 밖에 없는데, 주위에 현금인출기 있어요?


그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에게 물어본 건 나인데, 굳이 A에게 말을 건다.

-현금으로 계산해야죠.


나도 지지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 현금으로 20달러는 없는데 어떡해요. 숙소에 다녀오려면 왕복 두 시간 걸려요.


그는 내가 이렇게 말하는 데도 내 말을 무시하고는 A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현금이 충분하지 않다는 A의 대답을 들은 경찰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내가 말을 할 때는 들리지 않는 듯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하면서 A에게만 자꾸 따지는 게 기분 나빴다. 마치 이런 문제는 꼭 남자랑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찰의 모습이 거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찰관의 전화통화가 길어지는 동안 나는 매표소에 붙은 안내문을 찬찬히 읽어봤다. 무려 아홉 개나 되는 항목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대충 내용은 이랬다.


-입장권은 인당 10달러

-관람시간은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5시

-하루만 사용이 가능하고 썸보 프레이 쿡 사원 군 전체를 둘러볼 수 있음

-만 12세 미만 어린이는 나이를 증명하면 입장료가 무료


그러다 8번 항목에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중요함'이라고 강조 표시가 되어 있는 해당 항목은 이랬다.


-입장권(썸보 프레이 쿡 패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유의하기 바람. 만약 유적 관람 중 구매한 표를 잃어버릴 경우 벌금으로 50달러를 물게 될 것.


아, 우리가 그래서 이렇게 크게 혼이 났구나.

사실 바로 벌금을 매길 수도 있었는데 표를 사라고 한 번 기회를 준 걸 보면 이 아저씨도 그렇게 팍팍한 사람은 아니네. 이렇게 공지가 되어 있는 거라면 어쩔 수 없다. 정해진 것인 걸. 안내를 읽자마자 다 이해가 되는 걸 보니 나는 정말 한국인인가 보다.


그나저나 주변에 현금인출기도 없고 카드 리더기를 빌릴 곳이 없을뿐더러 돈을 가지러 호텔에 다녀오면 관람 마감시간이 지나버리는데, 어쩌지? 경찰관을 쓱 쳐다보니 아직도 심각한 표정으로 어딘가에 통화 중이다.


안내문 옆에는 썸보 프레이 쿡 사원군의 지도가 붙어 있었는데, A도 나도 그 지도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구글 지도 이름만 검색해서 찾아온지라 여기가 이렇게 규모가 큰 유적지인 줄도 몰랐던 거다. 우리의 부족한 준비성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이 주변 일대에는 150개가 넘는 사원이 분포되어 있고 대표적인 유적들은 위치에 따라 N, S, C, 이렇게 세 그룹으로 분류가 된다는 것이다. 150개요.......?


우리 같은 관광객도 많이 보이지 않는 작은 도시 주위에 유적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실 몇 개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고대 국가의 유적을 보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볍게 관광을 온 우리가 부끄러워졌다. 공부 좀 하고 올 걸.


그 와중에 아까 오전에 신청한 PCR 검사에 대한 답장이 왔다는 알림이 떴다. 곧바로 메일을 확인하니 그날 오전은 이미 신청 가능한 인원이 다 차서 검사를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이다. A도 메일을 받았는지 그가 받은 이메일을 나에게 보여줬다. 그런데 뭐야, A는 검사가 확정되었다는 메일인 거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A에게 내 메일을 보여주자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몇 초 일찍 제출했다고 그런가?


사실 이 상황에서 정말 화를 내면 안 되는데, 갑자기 정말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왔다.

지금 표를 살 수 없는 것이 누구의 잘못이 아닌데.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서 기다려야 하지? A는 그 센터에서 PCR 검사를 받을 수 있고 나는 다른 곳에서 받아야 하는 게 그의 잘못도 아닌데. 왜 꼭 지금 이런 소식을 들어야 하지?


게다가 이 유적을 보려고 프놈펜에서 여기까지 온 건데 이러다가는 유적을 보기는커녕 벌금만 내고 돌아가게 생겼다. 아, 지금은 벌금을 낼 현금도 없구나.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화를 꾹 참고 있는 와중에 경찰이 통화를 마쳤는지 우리에게 다가왔다. A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들, 그러면 내일 다시 와서 표를 사기로 해요.


내일 우리는 프놈펜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내가 눈을 굴리며 A를 쳐다봤다. A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이 우리에게 이제 됐다며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이미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 잡혀있는 데다가 프놈펜과 이곳은 아예 반대 방향이니 아마 우리는 내일 이곳에 다시 오지 못할 거였다.


하지만 언젠가 꼭 다시 와서 티켓을 살게요.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결국 캄퐁톰까지 온 보람이 없어져 버렸다. 이 나라에서는 왜 이렇게 쉬운 게 없냐 진짜. 한숨이 나왔다.

물론 우리가 유적지에 대해 미리 공부를 해 갔다면 표 값이라도 제대로 챙겨갔을 테니 이렇게 된 것도 다 우리 잘못이겠지만, 속상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결국 이렇게 썸보 프레이 쿡 유적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었다는 게 허탈했다. 게다가 하필 이때 예약이 다 차서 PCR 검사를 받을 수 없다는 메일을 받게 된 것까지, 정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짜증이 났다.


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아는지 캄퐁톰 시내로 들어온 A가 시장 앞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뭐야, 갑자기 왜?

내가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묻자 그가 앞에 있는 카페 아마존을 가리켰다.

-너 기분 안 좋잖아. 시원한 커피라도 마시자.


하지만 왜인지 꿀꿀한 기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로도 가시질 않았다. 아무래도 출국 전에 해야 하는 PCR 검사에서 양성이 나올까 봐 계속 걱정하고 있던 것도, 거하게 아프고 난 뒤 몸이 많이 약해진 것도 다 스트레스가 되어 내 속에 쌓여 있었나 보다. 그런데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들까지 더하고 나니 화가 북받치는 기분이었다.


결국 이불을 팡팡 차며 짜증을 털고 남자친구한테도 한껏 징징대고 나니 기분이 좀 괜찮아졌다. 한식을 먹고 싶다는 내 말에 A가 이리저리 한식당을 검색해봤지만 이 주위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혹시 호텔 루프탑에 있는 바에서 맛있는 음식을 팔까 싶어 올라가 봤는데 우리 둘 다 마땅히 먹고 싶은 게 없어 야경이랑 사진만 찍고 내려왔다. 그래도 노을이 지는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내 안에서 꿈틀대던 짜증도 한껏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사실, 결국 저녁으로 컵라면을 먹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기도 하다. 채워지지 않는 한식의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저녁을 먹고 쉬고 있던 나는 문득 아까 보았던 사원의 이름이 궁금했다. 제대로 관람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아까 봤던 사원의 이름만큼은 알고 싶었다. 게다가 매표소에서 보았던 지도 때문에 썸보 프레이 쿡에 대한 궁금증이 더 생긴 나는 언젠가 꼭 다시 방문하고 싶은 마음에 정보를 더 찾아보았다.


나무와 영혼이 얽혀버린 듯 신비로웠던 그 사원의 이름은 쁘라삿 다음 쯔레이(Prasat Daem Chrei). N 그룹에 해당되는 쁘라삿 썸보(Prasat Sambor)의 일부라고 한다. 직원들이 서 있었던 입구 주변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사원의 이름도 알아냈다. 쁘라삿 다음 찬(Prasat Daem Chan)이다. 이 사원은 가까이 가서 보지는 않았고 오토바이 위에서 사진만 찍어 남겨 두었다.


아, 다음에 꼭 제대로 와 봐야지. 썸보 프레이 쿡은 여행객들이 많지 않아 조용하게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이 큰 장점인 것 같다. 게다가 1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숲을 지켜온 고대 유적지라니, 존재만으로도 대단하고 벅차다. 그곳에서 느꼈던 평화로운 기분은 정말 설명하기 힘들다. 아마 유적지가 가진 역사 때문에 더 신비로운 기분을 느꼈지 않나 싶다.


썸보 프레이 쿡 주변은 캄보디아 고대국가인 첸라의 수도였다고 한다. 6세기말에 세워진 첸라(Chenla) 왕국은 당대 가장 강한 왕이었다고 알려진 이사나 바르만의 집권 후 세력을 넓혀 갔다. 캄보디아를 비롯해 라오스, 태국, 베트남 일부까지 영토를 확장한 이사나 바르만은 썸보 프레이 쿡이 있는 자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고 '이사나푸라(Isanapura: 이사나의 도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사나푸라. 정말 미지의 도시에 어울리는 예쁜 이름이다.


앙코르 제국 시대가 열리기도 전에 이렇게 큰 규모의 도시가 이곳에 세워졌었다니. 지금 남아있는 사원군의 규모만으로도 고대 도시의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됐다.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훼손된 것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도시의 잔재가 천년 하고도 몇 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남아있다는 게 대단했다. 나는 괜히 한번 더 고대 도시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이사나푸라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렇게 알고 보니 여기 정말 멋진 곳이잖아. 우리가 아까 발 딛고 서 있던 곳이 고대왕국의 수도였다니. 정말 신비롭다.


언젠가, 언젠가 꼭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겠다. 그리고 그때 썸보 프레이 쿡을 보러 가면 이사나푸라의 모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겠지. 오랫동안 숲속에 묻혀 긴 세월을 보낸 고대 도시를 온몸으로 느끼며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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