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모녀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인트리 Jul 04. 2024

팔랑귀가 살 수 있는 법

하쿠나마타타

때는 적어도 이십 년 전쯤 되는 것 같다..

나는 내가 견딜 수 있는 무게를 예상하지 않았다. 감당하지 못할 물건을 너무 많이 샀다. "이 가격에는 이 물건을 못 사요." 물건 자랑을 하시는 사장님의  한마디에 홀랑 넘어가서 내 비닐봉지 안에는 물건이 자꾸 쌓이고 있었다. 날은 더워서 손바닥에서 비닐봉지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꾸 밀려나고 있었다. 어린 막내를 등에 업고 한 손으로 들고 있던 비닐봉지는 찢어질 듯 위태로웠다. 봉지의 무게와 더위로 힘겹게 발길을 떼고 있었다. 시장을 벗어 나와 큰길에 접어들었다. 누군가 나를 바짝 따라오는 듯 느껴졌다. 휙 돌아보았다. 참으로 점잖아 보이는 중년의 어른이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는 혀를 끌끌 찬다.


"에고 애기엄마 복이 참 많은 상인데 남편이 이번주 안에 죽을 거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말씀 이세요?"

"이번주에 새댁에게 액운이 있어요. 그 액운을 물리 쳐야 해!!!"

나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 왔다. 겨우 서른 중반, 이렇게 젊은 나이인데 남편이 죽는다니, 뭔 이런 액운이 있는가? 마음속으로 온갖 끔찍한 단어들이 떠올랐다. 내 불안한 눈빛을 눈치챈 부인은 이어서 말을 했다.

"액운을 물리치는 고사를 지내면 괜찮아져요."

내 콩알만 한 심장은 그 말 한마디에 크게 안심을 했다.

"정말이에요? 어떻게 하면 돼요?"

나는 등에 아이를 업고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고, 손바닥이 찢어질 듯 아프게 물건을 쥐고 있다는 것도 잠시 잊고  중년부인의 말솜씨에 쉽게 녹아들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처녀귀신에게 홀린 듯이 부인의 걸음을 따라 걸었다. 부인은 내 앞에서 살짝 앞서 걸으면서

"여기서 조금만 가면 제를 지내는 곳이 있어요. 오늘 얼른 액운을 물리치고 가시는 게 좋아요. 새댁의 나쁜 운 때문에 남편이 죽으면 되겠어요? 나를 우연히 만났으니 새댁은 그나마 운이 좋은 거예요." 그분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다행이다. 나 때문에 남편이 죽을 수도 있다니 그건 안되지. ' 고마운 마음에 더욱더 열심히  따라갔다. 드디어 도착한 곳에는 큰 상이 차려져 있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땀이 범벅이 된 내가 들어서자 절을 하던 사람도 무릎을 꿇고 빌고 있던 사람도 나를 흘끔거리며 쳐다봤다. 어쩌다 고개를 돌리면 몇몇 사람들은 나와 마주친 시선을 빠르게 피했다.

"무엇을 기도 해야 해요?"

"새댁은 그냥 있으면 돼요. 우리가 나머지는 알아서 다 해 줄 것입니다. 혹시 현금 가진 것이 있으면 꺼내 놓고 기도 합시다." 내 손에는 그럴싸한 지갑이 있었다. 남편이 결혼 전 해외여행에서 사다 준 것이었다. 일명 비싼 지갑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현금이 없었다. 이미 시장에서 다 써버렸다.

"저 여기 현금이 만 이천 원밖에 없어요." 나는 지갑을 탈탈 털어서 내놓았다. 돈이 적어서 액운을 물리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했다. 돈이 든 내 손을 보던 부인은 표정 변화 없이

"괜찮아요. 오늘은 인사만 해서 액운을 밀어내고 다시 제대로 하면 돼요." 휴~거기서 나는 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 이천 원 치 기도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정신이 없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있었다. 일주일이 그렇게 짧을 줄 몰랐다. 그곳을 다녀온 이후 내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일주일 안에 빨리 와야 한다. 액운을 빨리 물리쳐야 한다.' 이런 내용들로 전화기 너머에서 그 부인은 내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제를 지내려면 이백만 원은 있어야 한다.' 말하는 것들이 모두 나를 초조함의 극치까지 몰고 가는 내용들이었다. '남편 몰래 어디서 빠른 시간 안에 돈을 융통해야 하나?' 전업주부였던 나는 돈을 만들어 낼 온갖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나의 초조함을 눈치챈 남편은 어느 날 출근을 하지 않고 내 주변을 맴돌았다. 평소 내 생활이 전화를 주고받는 관계가 거의 없다는 것을 남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김없이 전화벨이 울리자 남편이 전화를 가로챘다.

상대는 여전히 내가 전화를 받은 줄 알고  '일주일 안에 제를 지내야 하니 돈을 빨리 가지고 와라. 시간이 얼마 없고 액운은 눈앞에 와 있다.'라고 나에게 말하듯 재촉했을 게 뻔했다. 남편은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아주 차분하게 한마디 했다.

"그리 급한 일이면 그곳으로 찾아갈 테니 주소 불러 주세요. 나는 경찰 공무원입니다. " 남편은 준비하고 있었던 듯이 천연덕스럽게 경찰공무원을 사칭했다.

전화는 끊겼다. 그리고 다시는 전화가 오지 않았다. 심지어 없는 번호라고 나온다. 전화를 끊고 남편이 어이없어하면서 나를 봤다.

"당신, 어린이 통학 교육을 다시 받아야겠네. 자. 1번 아무나 따라가지 않기. 2번밖에 나갈 때 귀를 닫고 나갈 것." 남편은 그 후로도  밖에 나갈 때마다 나를 교육시켰다.


며칠 전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정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어쩔 수 없이 길거리를 배회했다. 나 약속에  늦으면 견디질 못한다. 그래서 약속은 항상 일찍 간다. 정류장에 마침 노점을 펼치고 있는 아저씨가 있었다. 화장품을 팔고 있다. 서성거리는 나를 보더니 크림을 듬뿍 찍어서 다짜고짜 내 손등에 발라보라 한다.

"이거 정가가 이십만 원이 넘어요. 크림이 진짜 좋다니까요."

거절을 못하고 나는 손등을 내밀었다. 손등에 발린 크림을 문지르면서

"좋네요." 대답을 했다. 하필 주변에 사람이 없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노점 사장님은 포털사이트에서 크림에 관한 광고를 찾아 보여 주신다.

"이거 봐요. 진짜라니까요?"

어쩔 수 없이 그분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아. 그러네요." 대답을 해 드렸다. 또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약속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장소를 떠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자니 어색함이란 단어가 마음을 한없이 불편하게 해서 결국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고 말았다.

"그래서 얼만데요?" 기다렸다는 듯이 노점 사장님은

"현금 만원요.~" 답을 하신다. 내 팔랑귀가 지갑을 꺼내 들고 말았다. 그리고 거창한  크림을 사고 말았다.


세상에서 속여먹기 제일 쉬운 사람이 자기 마누라라고 놀리는 남편의 말이 생각난다. 주장이 세지도 않고 고집이 세지도 않아서인지 남의 말에 곧잘 넘어가버리는 나다. 이런 한심한. 뭐 어쨌든 그분께 하나라도 팔게 해서 장사에 도움이 됐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이다. MBTI가 'J'인 계획형 인간이 제일 힘들어하는 성향이 나 같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나를 잡아주는 가족들이 계획형이다. 운명은 그런대로 나처럼 팔랑귀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도 하나 보다. 이만하면 팔랑귀로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가졌으니 뭐 딱히 나를 바로잡으려 애쓰지도 않는다.

 "하쿠나 마타타(걱정 마, 잘 될 것이다)"

라이온킹에서 주인공 심바에게 친구들이 불러주던 노래다. 심바의 아버지 무파사가 삼촌에게 죽고 정글로 쫓겨나서 심난하던 주인공의 마음을 달래주던 곡이다. 내가 나의 팔랑귀를 골치 아파할 필요 없다. 어찌 됐든 60 평생을 살아왔고, 결국은 다 잘 될 것이라 믿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눈물의 여왕` 금사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