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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내는살림 Sep 05. 2022

맨손에서 식기세척기까지. 설거지의 역사

설거지의 추억을 되돌아보며

 '너 집에서 설거지 한 번도 해본 적 없지?'


대학생 때 봉사활동으로 몽골에 가서 같이 간 팀원들끼리 밥을 해먹은 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복학생 오빠가 스윽 보더니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당시에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물론 집에서 한 번도 설거지를 해본 적이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내가 그릇을 만지는 모양새만 보고도 그걸 알아차렸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 나이 먹도록 설거지를 제대로 안 해봤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대충 대답을 하고 그릇을 하나하나 씻어서 건조대에 올려놨었다. 소심해서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어보지도 못했고 그냥 지나갔다. 


친정엄마는 밥을 다 먹고 그릇을 개수대에 넣을 때 아무렇게나 넣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정확히는 기름기가 있는 것, 빨간 국물이 있는 곳에(주로 라면 국물) 물컵을 넣어놓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기본적인 것이지만 빨리 그릇을 넣고 딴짓을 하고 싶었던 나는 엄마의 룰(?)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었다. 그러고는 컵에서 물비린내가 난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탄자니아에서 생활했을 때에는 설거지 경력이 어느 정도 쌓여서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문제는 씻어야 할 그릇의 양이 많았다는 것. 한인들이 많이 없는 동네여서 특별한 날이면 어른들 열댓 명이 다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곤 했다. 주로 한 그릇 음식이었지만 반찬 몇 개 올리고, 후식으로 과일 올리다 보면 수십 개의 그릇이 나오곤 했다. 막내였던 나는 비슷한 또래의 친구와 2인 1조로 설거지를 도맡아 했었고 우리는 그릇을 하나씩 닦으며 결혼을 하면 혼수물품으로 식기세척기를 1순위로 사겠다 다짐을 했었다. 



결혼을 했다. 

비좁은 신혼집에 식기세척기가 들어갈 여유는 없었다. 가전 가구를 한꺼번에 살 때 사지 않으니 식기세척기를 사기가 쉽지 않았었다. 다행이라면 시댁에 식기세척기가 있었다는 것. 신혼집에서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 한 명이 쓰는 그릇의 개수는 많지 않은 편이어서 식기세척기가 없는 것이 아쉽지 않았지만, 시댁에서 명절 때 손님을 치르고 큰 교자상 가득 찬 그릇들을 보며 한숨이 나오다가도 어머님 댁에 있는 식기세척기의 존재를 깨닫고는 금세 안색이 돌아왔었다. 그냥 물로 헹구기만 했으면 되니까! 어느 정도 나의 바람이 이루어진 셈이다. 


그런데 시부모님이 이사를 가면서 아파트 옵션에 식기세척기를 뺐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애가 탔다. 아. 탄자니아에서 갈고닦았던 설거지 실력을 뽐낼 기회가 왔군! 힘들지는 않았다. 시간이 많이 걸릴 뿐이었고, 음식은 어머님께서 워낙에 잘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고무장갑을 꼈다. 



남편이 한 달 동안 휴가를 받고, 마침 내가 아파서 헤롱 거리느라 집안일에 신경을 못쓰고 있었다. 남편이 아이들을 케어하고 밥을 하고 뒷정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했었다. 이렇게 며칠을 지내더니 대뜸 나에게 식기세척기를 사야겠다고 선언을 한다.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포였다. 설거지하는 데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것을 하는 게 효과적일 거라면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남편이 그렇게 말하니 식기세척기가 가지고 싶지 않았다. 다른 것보다도 식기세척기를 넣어야 하는 곳에 서랍장을 빼고, 그 안에 있던 물건들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남편의 설득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고 식기세척기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식기세척기에 넣지 왜 그걸 하나씩 씻고 있어~'

오늘 저녁, 아니 자주 남편이 나에게 하는 말이다. 그릇 한 두 개 컵 몇 개정도는 그냥 내가 설거지를 하는 것이 편할 정도로 설거지에 익숙해졌다. (십여 년 전 그 복학생 오빠에게 지금 내 모습을 뽑내고 싶을 정도로! ㅋㅋ) 그릇을 모아서 물로 한 번 휘리릭 헹군 다음 같은 것끼리, 크기별로 차곡차곡 쌓아둔다. 스텐 설거지 볼에 주방세제를 주룩 적당량 짜서 넣고, 따뜻한 물을 틀어서 거품을 낸다. 애벌 설거지를 한 그릇을 주방세제 푼 물에 담가서 수세미로 닦은 다음 헹군다. 고무장갑이 녹을정도로 뜨거운 물에 그릇을 헹구고 건조대에 올려둔 뒤, 키친 클로스로 닦아 원래 자리에 올려다 두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말한다. 

'주스 먹은 컵은 다른데 포개어두지 마!'

'기름기 있는 그릇은 따로 둬!'

'라면 먹고 라면 국물은 꼭 비우고, 거기에 컵 넣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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